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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대왕인릉천봉비(純宗大王仁陵遷奉碑)

자료명 순종대왕인릉천봉비(純宗大王仁陵遷奉碑) 저자 이공(李玜), 이변(李昪), 이변(李昪),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0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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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13-1)
· 작성시기 1393
· 비고 2-5300
1856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공(李玜)
이변(李昪)
이변(李昪)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89.7 X 109.9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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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을 천봉(遷奉)하고 세운 능비(陵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순종대왕인릉천봉비(純宗大王仁陵遷奉碑)
[내용 및 특징]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을 경기도 파주군 교하(交河)에서 1857년(철종 8) 광주(廣州) 헌릉(獻陵) 우측으로 천봉하고 세운 천봉비(遷奉碑)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인릉은 본래 순조 승하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하였다가, 현재 위치인 태종의 헌릉(獻陵) 옆으로 이장되었고, 순원왕후도 함께 합장되었다. 따라서 헌릉과 인릉을 가리켜 헌인릉이라 한다. 한편 이 금석문의 표제가 ‘순종대왕인릉’인 까닭은 순조의 묘호가 아직 개정되지 않은 시점에 세워진 까닭이다. 순조의 묘호는 승하 당시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순조(純祖)로 개정되었다.
음기의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우선 ‘순종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은 숭정(崇禎) 기원후 163년(1790) 6월 18일 탄생, 경신년(1800) 2월 왕세자 책봉, 같은 해 7월 즉위, 갑오년(1834) 11월 13일 승하, 을미년(1835) 4월 19일 교하(交河) 구치(舊治) 을좌지원(乙坐之原)에 장례 지낸 일을 기록하였다. 재위는 34년이며, 45세의 수를 누렸다. 말미에 헌릉의 우강(右岡)에 천봉한 사실과 숭정 기원후 208년(헌종 1) 8월에 표석을 세운 것을 기술하였다.
피전자 순조의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이며, 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순조(純祖)로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순조의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 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 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 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으며, 저술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묶여진 데 더하여 문집으로 『순재고(純齋稿)』도 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인릉(仁陵)이다.
이 표석과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1806년(순조 6)에 순조의 태를 묻고 석물(石物)로 조성하여 태실 앞에 세운 비석의 탁본인 《순조대왕태실비(純祖大王胎室碑)》가 소장되어 있다. 이 탁본은 전면과 음기를 하나의 족자에 장황한 형태로 전면에는 대자해서(大字楷書)로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의 6자를 새겼고, 음기에는 ‘가경11년 10월 12일 건(嘉慶十一年十月十二日建)’이라 새겨 입비(立碑) 일자를 밝혔다. 순조의 태실은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의 복천암(福泉庵) 맞은 편, 속칭 태봉산(胎峯山) 산봉우리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서각에는 이 외에도 순조의 인릉을 처음 조성하며 세운 《순종대왕인릉비(純宗大王仁陵碑)》(1835, 헌종 1), 순조와 순원왕후를 합봉할 때 세운 《순조대왕인릉합봉비(純祖大王仁陵合封碑)》(1857, 철종 8), 대한제국기에 순조를 황제로 추숭하며 세운 《순조숙황제인릉추숭비(純祖肅皇帝仁陵追崇碑)》(1900, 광무 4)를 비롯하여, 처음 인릉을 조성할 때 매장한 《순조인릉지문(純祖仁陵誌文)》, 천장했을 때 매장한 《인릉천봉시지문(仁陵遷奉時誌文)》 등이 소장되어 있어 인릉 관련 금석문 일괄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중반 인릉의 천릉사실과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순조(純祖)]태실석난간조배의궤(胎室石欄干造排儀軌)』(규장각, 13968) /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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