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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대원군신도비명(全溪大院君神道碑銘)

자료명 전계대원군신도비명(全溪大院君神道碑銘) 저자 이광(李壙), 조두순(趙斗淳), 이변(李昪), 이변(李昪),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33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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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포천 선단리 (현재주소: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산11)
· 작성시기 1851
· 비고 2-5333
1851(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광(李壙)
조두순(趙斗淳)
이변(李昪)
이변(李昪)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명(神道碑銘)
· 크기(cm) 281.5 X 80.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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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철종(哲宗)의 모친 완양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의 묘비석(墓碑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전계대원군신도비명(全溪大院君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5대 국왕 철종(哲宗)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1851년(철종 2)에 세워졌다. 탁본은 상․하 구분 없이 한 장의 종이에 장황하였다. 풍대(風帶)는 없고, 축은 옥축(玉軸)을 썼다.
비액(碑額)은 대자전서(大字篆書)로 ‘어필(御筆) 대원군지비(大院君之碑)’라 쓰였다. 서(序)와 명(銘)은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영조의 증손, 장헌세자의 손자임을 강조하여 전계대원군의 아들인 철종의 정통성을 부각한 내용이다. 글씨는 비액과 본문 모두 철종의 어필이다.
전계대원군(1785~1841)은 은언군(恩彦君)의 다섯째 아들이다. 곧 장헌세자(사도세자, 莊祖로 추존)의 손자이며, 영조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李氏 )이다. 1779년(정조 3) 아버지 은언군이 홍국영(洪國榮)과 역모하였다는 벽파(僻派)의 무고에 의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아버지와 함께 농사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처음 전계군(全溪君)에 봉해졌다가 아들인 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전계대원군의 생부 은언군은 두 차례 유배생활을 할 정도로 왕족으로서는 불운한 삶을 살았다. 유배의 명이 자신의 과오로부터 비롯된 점도 있었지만, 당시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뜻하지 않게 역모의 화근으로 끊임없는 지목의 대상의 된 데 기인한 것이었다. 결국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당시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로부터 영세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최후의 적소인 강화에서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아들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785~1841)이고, 그의 아들이 조선 25대 국왕 철종으로, 철종 즉위와 함께 은언군도 신원되었다.
비문을 지은 조두순(1796~1826)은 황감제시(黃柑製試: 매년 제주도에서 진상한 밀감을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하면서 거행하는 일종의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뽑히고, 이어 그 해 4월에 열린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대교로 선발되었다. 그 뒤 1866년(고종 3)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하기까지 40년 동안을 줄곧 벼슬하면서 순조·헌종·철종·고종을 보필하였다. 순조 때에는 승지를 거쳐 대사성을 지냈고, 헌종 때에는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부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41년(헌종 7) 공조판서에 올랐다. 뒤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를 지내다가 1849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신도비문을 지었으며,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동문휘고(同文彙考)』의 편찬을 담당하고,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853년(철종 4) 우의정에 올랐으며, 1865년 영의정이 되기까지 지중추부사 및 판중추부사를 역임하면서 우의정·좌의정을 연임하였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은언군(《은언군신도비명(恩彦君神道碑銘)》)과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명이 동시기인 1851년(철종 2)에 세워졌는데, 모두 철종이 직접 글씨를 썼다. 철종 즉위 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서 즉위 초 왕권을 확립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들이다. 한편 정조 대까지 열성어필은 자료가 많은 편이나, 그 이후로는 어필의 수가 급감하는 추세를 보인다. 철종의 어필도 현재 몇 점 남아있으나 그리 많은 수가 아니라 전체적인 어필의 변화과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이 비문은 철종의 서체 뿐 아니라 조선 말기 어필의 변모양상을 살피기에도 유용한 자료이다.
[자료적 가치]
전계대원군의 생애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지 않은 어필을 남긴 철종의 서체를 탁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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