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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부대부인묘비(鈴原府大夫人墓碑)

자료명 영원부대부인묘비(鈴原府大夫人墓碑) 저자 염씨(廉氏), 김좌근(金左根), 이하응(李昰應),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34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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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양주 답동 (현재주소: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산11)
· 작성시기 1851
· 비고 2-5334
1851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염씨(廉氏)
김좌근(金左根)
이하응(李昰應)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11.0 X 100.9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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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철종(哲宗)의 생모(生母) 영원부대부인(鈴原府大夫人)의 묘비석(墓碑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영원부대부인묘비(鈴原府大夫人墓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5대 국왕 철종(哲宗)의 생모인 영원부대부인 염씨(廉氏)의 묘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족자는 풍대(風帶)가 없고, 축은 옥축(玉軸)이다.
탁본은 묘비석의 전면과 음기를 하나의 족자로 합본(合本)하여 장황하였다. 우측의 전면 탁본에는 예서로 “유명조선국영원부대부인영평염씨지묘(有明朝鮮國鈴原府大夫人鈴平廉氏之墓)”를 대자(大字)로 썼다. 좌측 음기의 탁본은 해서로 영원부대부인의 가계, 성품, 소생 등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중에 성인을 생산하여 국가의 명운을 크게 열어준 공덕을 칭송하였다. 음기의 말미에는 이 금석문을 짓고 쓴 인물의 관직과 이름이 있다. 찬자는 김좌근(金左根), 서자는 이하응(李昰應)이다. 전면과 음기의 서자를 따로 구분하여 적지 않아 모두 이하응이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면의 예서대자(隸書大字)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영원부대부인 염씨(1793~1834)는 철종의 생모이다. 본관은 영평(鈴平)이며,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염성화(廉星華)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에 추증된 지씨(池氏)이며 학생(學生) 지우영(池右英)의 딸이다. 영원부대부인은 어려서부터 조용한 성품이었으며 자라서는 효애(孝愛)가 돈독하였다. 사망 후 양주(楊州) 답동(沓洞) 경좌원(庚坐原)에 장사지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부대부인(府大夫人)에 봉작되었다. 이후 관향(貫鄕)을 바로잡아 다시 봉작하였는데, 이 내용이 『비변사등록』에 상세하다. 1861년(철종 12) 11월 6일 기사에 의하면 ‘좌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부대부인(府大夫人)의 향관(鄕貫)을 지금 바로잡아서 봉작(封爵)의 작호(爵號)를 즉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어 하비(下批)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그리하라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는 영원부대부인 염씨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으로 고쳐 봉작(封爵)한 일을 말한다.
비문을 지은 김좌근(1797~1869)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838년(헌종 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실직에서 물러났다가 기로소에 들었다.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의 핵심인물로서 당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비문의 글씨를 쓴 이하응(1820~1898)은 본관이 전주,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고종의 아버지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낙척한 왕손으로 불우한 시기를 보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 연계함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철종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命福)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하응은 12세의 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고,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서예와 그림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그림이 유명하다.
《영원부대부인묘비》와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철종의 생부(生父)이자 영원부대부인의 부군(夫君)이 되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신도비가 소장되어 있다. 비액(碑額)은 대자전서(大字篆書)로 ‘어필(御筆) 대원군지비(大院君之碑)’라 쓰였다. 서(序)와 명(銘)은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영조의 증손, 장헌세자의 손자임을 강조하여 전계대원군의 아들인 철종의 정통성을 부각한 내용이다. 글씨는 비액과 본문 모두 철종의 어필이다. 전계대원군(1785~1841)은 은언군(恩彦君)의 다섯째 아들이다. 곧 장헌세자(사도세자, 莊祖로 추존)의 손자이며, 영조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李氏)이다. 1779년(정조 3) 아버지 은언군이 홍국영(洪國榮)과 역모하였다는 벽파(僻派)의 무고에 의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아버지와 함께 농사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처음 전계군(全溪君)에 봉해졌다가 아들인 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철종의 조부 은언군(《은언군신도비명(恩彦君神道碑銘)》)과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명이 동시기인 1851년(철종 2)에 세워졌는데, 모두 철종이 직접 글씨를 썼다. 철종 즉위 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서 즉위 초 왕권을 확립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들이다.
[자료적 가치]
영원부대부인의 생애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왕실의 정통성을 둘러싼 이해관계 및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대원군의 예서와 해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 / 『고종실록(高宗實錄)』 /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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