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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신도비명(恩彦君神道碑銘)

자료명 은언군신도비명(恩彦君神道碑銘) 저자 이인(李裀), 조인영(趙寅永), 이변(李昪), 이변(李昪),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29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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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양주 진관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 작성시기 1851
· 비고 2-5329
1851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인(李裀)
조인영(趙寅永)
이변(李昪)
이변(李昪)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명(神道碑銘)
· 크기(cm) 276.7 X 85.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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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은언군(恩彦君) 인(䄄)의 신도비(神道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은언군신도비명(恩彦君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庶子)이자, 영빈임씨(英嬪林氏)의 소생인 은언군(恩彦君, 1755~1801) 이인(李䄄)의 신도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신도비의 찬자는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이며, 철종(哲宗, 1831~1863)의 어제어필이다. 신도비의 건립시기는 1851년(철종 2)이며, 소재는 양주(楊洲) 진관(津寬) 신팔면(新八面)으로 되어 있다. 비석의 상단은 “어필은언군지비(御筆恩彦君之碑)”라고 쓴 대자(大字) 두전(頭篆)이 있으며, 비명(碑銘)은 해서로 쓰여 있다.
비문은 조인영이 철종의 명을 받고 지은 것으로, 비문의 내용은 조인영의 문집인 『운석유고(雲石遺稿)』에 동일 제목으로 실려 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도입부에는 은언군의 가계와 비석을 세우게 된 경위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였다. 둘째 부분은 신도비의 본론에 해당하며, 마지막 부분은 은언군의 공덕을 기리는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비문의 가장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는 본론에서는 첫째, 은언군의 출생과 더불어 혼인과 관력에 대한 기술, 둘째, 영조 47년(1771) 아우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제주에 귀양갔다가 적소에서 아우를 잃고 돌아온 사실, 셋째, 제주 유배에서 돌아와 공검근신(恭儉謹愼)한 생활 속에서 학문에 주력하였던 모습, 넷째, 정조 10년(1786) 재차 강화(江華)에 귀양을 가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적소에서 생을 마친 과정, 마지막으로 두 명의 부인과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계(後繼)에 대해 기술하였다. 비교적 장문으로 쓰였으며 다양한 기록을 담고 있어 은언군의 생애를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은언군은 두 차례 유배생활을 할 정도로 왕족으로서 불운한 삶을 살았다. 유배의 명이 자신의 과오로부터 비롯된 점도 있었지만, 당시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뜻하지 않게 끊임없이 역모의 화근으로 지목된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결국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당시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로부터 영세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최후의 적소인 강화에서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아들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785~1841)이고, 그의 아들이 조선 25대 국왕 철종으로, 철종 즉위와 함께 은언군도 신원되었다.
지문을 지은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은 10여 년 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가 재정의 확보와 민생 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자주 건의하였다. 또 이단이 성행하는 것은 정학(正學 : 朱子學)이 천명되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도산·화양 등의 서원에 대한 특전(特典)의 부여와 충신·의사의 포증(褒贈),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선비의 발탁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한국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특히 1816년 성절사(聖節使)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 종을 기증하였다. 다음 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했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정조·순조의 두 왕 및 익종의 대리청정 때 보감을 편찬하였다.
정조 대까지 열성어필은 자료가 많은 편이나, 그 이후로는 어필의 수가 급감하는 추세를 보인다. 철종의 어필도 현재 몇 점 남아있으나 그리 많은 수가 아니라 전체적인 어필의 변화과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이 비문은 철종의 서체 뿐 아니라 조선 말기 어필의 변모양상을 살피기에도 유용한 자료이다.
[자료적 가치]
은언군의 생애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지 않은 어필을 남긴 철종의 서체를 탁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運石遺稿』(한국문집총간 299) / 趙寅永 / 민족문화추진회, 200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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