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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대왕경릉합봉비(憲宗大王景陵合封碑)

자료명 헌종대왕경릉합봉비(憲宗大王景陵合封碑) 저자 이환(李奐), 김씨(金氏), 미상, 서희순(徐憙淳),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1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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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2)
· 작성시기 1849
· 비고 2-5310
184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환(李奐)
김씨(金氏)
미상
서희순(徐憙淳)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28.0 X 72.4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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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헌종(憲宗)과 효현왕후(孝顯王后)의 능표석(陵表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헌종대왕경릉합봉비(憲宗大王景陵合封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4대 국왕 헌종(憲宗, 1827~1849)과 비(妃)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1843)의 경릉(景陵)에 세운 능표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표석이 세워진 시점은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한 해인 1849년이며 이미 조성되었던 효현왕후의 능에 헌종의 능을 합봉하면서 세웠다.
전면은 동일본 4점이 있다. 내용은 ‘조선국 헌종대왕경릉 효현왕후부좌(朝鮮國 憲宗大王景陵 孝顯王后祔左)’의 글자를 3행에 걸쳐 소전체(小篆體)로 썼다. 음기의 탁본은 5점이 소장되어 있다. 헌종과 효현왕후의 출생부터 승하까지의 간략한 이력을 단아한 해서체로 6행에 걸쳐 썼다. 내용에서는 대두 및 격자를 온전하게 지켜 왕실금석문으로서의 격식을 갖추었다. 음기의 찬자는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다.
내용은 헌종의 탄생과 왕세자 책봉, 국왕에 즉위한 내용과 재위 15년 만에 승하한 내용, 원비(元妃)에 대한 간략한 이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능표석의 음기에 상세하다.
“경문위무 명인철효 헌종대왕(經文緯武 明仁哲孝 憲宗大王)은 순조 27년(1827) 7월 18일에 탄생하여 순조 30년(1830) 9월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순조 34년(1834) 11월에 국왕에 즉위하였으며, 재위 15년 만인 헌종 15년(1849) 6월 6일에 승하하였다. 그 해 10월 28에 양주(楊州) 건원릉(健元陵) 서쪽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나이 23세였다. 원비인 효현왕후 김씨는 순조 28년(1828) 3월 14일에 탄생하였고, 헌종 3년(1837)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 9년(1843) 8월 25일에 승하하여 12월 2일에 장사지내니 16세였다.”
헌종은 추존된 익종(효명세자)과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딸인 신정왕후 조씨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이다. 헌종은 즉위 초 순조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순조 생전에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도 정국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경쟁관계가 계속되었다. 1839년(헌종 5) 프랑스 신부 및 천주교도들을 처형했고 9월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했다. 헌종은 1841년부터 친정을 했으나 김좌근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의 세력다툼에서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羹墻錄)』, 『삼조실록(三朝實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을 편찬하였다.
효현왕후 김씨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증영의정(贈領議政)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1828년(순조 28) 3월 14일 탄생하였다. 1837년(헌종 3) 왕비로 책봉되었다. 1843년(헌종 9) 8월 25일 승하하였는데 당시 16세였다. 시호는 효현(孝顯)이다.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라 하고 착한 행실이 안팎에 나타나는 것을 ‘현’이라 한다는 시법을 따랐다. 그녀의 능은 헌종의 능과 영역을 같이 하면서 봉분을 달리한 동원이봉(同原異封)의 형태이다.
조성은 왕후가 사망한 그 해 9월 1일에 사옹원에서 장례절차를 맡은 대신들이 회동한 후 9월 6일 정자각 대량을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표석의 제작은 근 3개월 가까이 계속되어 11월 29일 비각 공사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현재 경릉 내에 있으며 경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번지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 193호이다. 철종은 즉위 초에 현종대왕과 효현왕후의 태실에서 큰 제사를 올리면서 효현왕후의 존호를 ‘경혜(敬惠)’ ‘정순(靖順)’으로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더 올렸다. 대한제국시기까지 올린 존호와 휘호를 더하면 ‘단성수원경혜정순효현성왕후(端聖粹元敬惠靖順孝顯成王后)’이다.
정원용은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 출신으로 20여 년 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했다고 한다.
탁본 외에도 장서각에는 경릉(景陵) 관련 금석문으로 《헌종경릉지문(憲宗景陵誌文)》(1849년, 헌종 15), 《헌종대왕경릉합봉비(憲宗大王景陵合封碑)》(1904년, 광무 8), 《효정왕후경릉지문(孝定王后景陵誌文)》(1904년, 광무 8), 《경릉지석함첩(景陵誌石函帖)》(1904년, 광무 8), 《헌종성황제경릉추숭비(憲宗成皇帝景陵追崇碑)》(1908년, 융희 2) 등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헌종과 효현왕후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장서각에 소장된 경릉 관련 금석문 일괄을 통해 헌종과 그 빈들에 대한 왕실 추숭사업의 일련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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