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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종대왕수릉비(翼宗大王綏陵碑)

자료명 익종대왕수릉비(翼宗大王綏陵碑) 저자 이영(李旲),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05-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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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2)
· 작성시기 1835
· 비고 2-5305-1, 2-5305-2
183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영(李旲) 1809 - 1830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40/음기255.3 X 전108.6/음기109.4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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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익종(翼宗)의 수릉(綏陵) 앞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익종대왕수릉비(翼宗大王綏陵碑)
[내용 및 특징]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를 익종(翼宗)으로 추숭한 뒤 수릉(綏陵) 앞에 세운 표석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비문의 끝에 이 비석을 세운 간기가 적혀 있는데, 헌종(憲宗) 원년(元年)으로 되어 있어 1835년임을 알 수 있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양주군(楊州郡) 천장산(天藏山)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다.
탁본의 가장자리에 비단을 대어 족자로 장황하였다. 풍대(風帶)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천리(天裏)의 남색 비단이 약간 탈색되었고, 상축 겉면의 비단에 약간의 훼손이 있다. 전면은 소전체(小篆體) 전서로, 음기는 중자해서(中字楷書)로 썼다. 축두(軸頭)는 옥축(玉軸)을 썼다. 전면은 ‘조선국/익종대왕수릉(朝鮮國/翼宗大王綏陵)’이라 씌여 있다. 음기의 내용은 익종의 탄생일로부터 왕세자 책봉, 대리청정, 승하와 더불어 장사지낸 시기 등에 대한 날짜가 명기되어 있다. 헌종이 즉위한 1834년에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시호(諡號)와 묘호(廟號), 묘호(墓號)를 올림과 동시에 능호를 수릉으로 봉릉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음기의 내용을 번역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익종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翼宗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은 숭정(崇禎, 1628~1644) 기원후 182년 기사(己巳)(1809년) 8월 초9일 정유(丁酉)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탄생하셨다. 임신(壬申, 18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정축(丁丑, 1817)에 태학(太學)에 들어가셨다. 정해(丁亥, 1827)에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경인(庚寅, 1830) 5월 초6일 임술(壬戌)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승하하셨다. 그해 8월 초4일 을축(乙丑)에 양주 천장산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동궁(東宮)에 있은 지 19년이요, 춘추 22세이다. 시호(諡號)는 효명(孝明)이요, 묘호(廟號)는 문우(文祐)요, 묘호(墓號)는 연경(延慶)이다. 갑오(甲午, 1834) 11월에 금상(今上; 憲宗)께서 즉위하여 왕으로 추존(追尊)하고,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올리고 봉릉(封陵)하기를 수릉(綏陵)이라 하였다. 상(上; 헌종) 원년(元年) 을미(乙未, 1835) 월(月) 일(日)”
이름은 영(旲; 원래의 음은 대이나 영으로 부르도록 정하였음),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이다. 23대 왕인 순조의 세자(世子)로 어머니는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로 조순(祖淳)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풍양조씨(豊壤趙氏)를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세자빈인 조씨 일족들이 그 뒤 대거 진출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일파와의 정치적 세력투쟁이 시작되어 정국을 혼란상태로 이끌어갔고, 이와 같은 사실은 지배층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민생을 도탄상태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이라 하였다.
익종대왕의 수릉은 이후로 1846년(헌종 12)과 1855년(철종 6) 두 차례에 걸쳐 천장(遷葬)이 이루어졌다. 천장을 완료한 후에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천봉(遷奉 碑)를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과 체제는 천장을 언급한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동일하다.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익종의 행장(行狀)과 지문(誌文) 등을 모아 놓은 책으로, 외할아버지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 등이 지은 『수릉성장(綏陵誠狀)』과 이상황(李相璜, 1763~1841) 등이 지은 『수릉지장(綏陵誌狀)』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수릉성장』에는 익종의 행장을 비롯하여 《수릉지문(綏陵誌文)》, 《봉왕세자교명문(封王世子敎命文)》, 《죽책문(竹冊文)》,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 《추숭상존호묘호옥책문(追崇上尊號廟號玉冊文)》, 《빈궁친제문(殯宮親祭文)》, 《수릉표석음기(綏陵表石陰記)》 등이 수록되어 있어 익종의 왕세자로부터 국왕으로 추존되기까지의 과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규장각에도 동일 내용의 『수릉성장』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효명세자의 국왕 추숭으로 인한 여러 호칭의 변화와 금석문의 수립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수릉성장(綏陵誠狀)』(장서각, 2-672)
『수릉지장(綏陵誌狀)』(장서각, 2-673)
『수릉지문(綏陵誌文)』(장서각, 2-3974)
『수릉성장(綏陵誠狀)』(규장각, 2071)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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