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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연경묘비(孝明世子延慶墓碑)

자료명 효명세자연경묘비(孝明世子延慶墓碑) 저자 이영(李旲),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0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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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2)
· 작성시기 1830
· 비고 2-5304-1, 2-5304-2
183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영(李旲) 1809 - 1830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30.7/음기250.7 X 전106.3/음기105.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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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묘인 연경묘(延慶墓) 묘표석(墓表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효명세자연경묘비(孝明世子延慶墓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3대 국왕 순조(純祖)의 장자(長子)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연경묘(延慶墓) 앞에 세워진 묘표석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에는 ‘조선국/효명세자연경묘(朝鮮國/孝明世子延慶墓)’의 글자를 소전(小篆)으로 새겼고, 음기는 중자해서(中字楷書)로 효명세자의 탄생과 왕세자 책봉, 입학, 사망, 장례일과 장소, 시호와 묘호 등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으며, 말미에는 표석의 건립연대가 적혀 있다.
음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자는 순조 9년(1809) 8월 9일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태어났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왕세자의 책봉례를 행했는데, 그때 나이가 네 살이었다. 순조 17년(1817) 태학의 생도들 틈에서 알성(謁聖)하고 학업을 시작하였으며, 순조 27년(1827) 2월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순조 30년(1830)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사망하였고, 그 해 8월 초4일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유좌(酉坐)의 방향에 장사지냈다. 동궁(東宮)으로만 19년을 있었고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諡號)는 효명(孝明), 묘(廟)는 문우(文祐), 묘(墓)는 연경(延慶)이라 하였다.
세자가 사망한 뒤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이 지은 지문(誌文)을 보면, 어머니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조순의 딸이고, 세자를 낳을 때 꿈에 용이 나타난 상서가 있었다고 한다. 효명세자의 이름은 영(旲)이고,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이다. 1819년(순조 19) 10월에 풍양조씨(豊壤趙氏) 판서(判書) 만영(萬永)의 딸과 가례를 행했는데, 왕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는 후일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의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을 등극케 하는 주역으로서 활약하였다. 효명세자가 사망한 뒤 익중(翼宗)으로 추존되자 왕대비에 오른 신정왕후는 83세의 천수를 누리다가 1890년(고종 27) 4월에 승하한 뒤 문조(文祖, 추존왕)의 능에 합장되었다. 문조는 1899년(광무 3)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에 추존되었다.
연경묘 표석의 마지막 행에 이 비석을 세운 시기가 순조 30년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효명세자가 순조 30년(1930) 5월 6일에 사망한 후 양주 천장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바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묘의 조성과정과 비석의 건립과정은 『연경묘소도감의궤(延慶墓所都監儀軌)』에 상세히 실려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세자가 사망한 후 7월 7일 재실(齋室) 이하 터닦기 공사를 시작으로 비석도 함께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17일에는 표석(表石), 농대석(籠臺石) 등을 바르게 다듬는 작업을 거쳐 양주 천장산 능에 세웠다.
이후 1834년(헌종 즉위) 11월에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시호를 추숭하여 ‘돈문현무인의효명세자(敦文顯武仁懿孝明世子)’라 하고 묘호는 익종(翼宗), 능호는 수릉(綏陵)이라 하였다. 수릉비의 전면에는 전서체로 ‘조선국/익종대왕수릉(朝鮮國/翼宗大王綏陵)’이라 새겼다. 1846년(헌종 12) 윤5월 20일 능지가 풍수지리상 길하지 못하다는 중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양주의 능을 용마산(龍馬山) 아래 계좌(癸坐) 방향으로 이장했다. 그런데 수릉은 큰 비가 올 때마다 재실 앞까지 물이 범람하였으므로, 이장을 다시 논의한 결과 1855년(철종 6) 8월 26일에 건원릉(健元陵) 왼쪽 임좌(壬坐) 방향의 언덕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현재 수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번지 동구릉의 하나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적 제 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효명세자의 간략한 이력은 물론 사망 이후 여러 추숭과정과 천장에 의한 호칭의 변화와 함께 능제의 변모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19세기 전반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그 장황방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연경묘소도감의궤(延慶墓所都監儀軌)』(규장각 13725~8)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열정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 2003.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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