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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묘비(孝昌墓碑)

자료명 효창묘비(孝昌墓碑) 저자 이순(李㬀),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31-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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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 작성시기 1786
· 비고 2-5331-1
1786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순(李㬀) 1782 - 1786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215.5 X 74.7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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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86년(정조 10) 5세의 나이로 사망한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표석(表石).
원자료제목
· 표제효창묘비(孝昌墓碑)
[내용 및 특징]
1786년(정조 10) 당시 정조의 원자(元子)였던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가 사망함에 따라 묘를 조성하고 세운 표석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현재 전면은 없고 음기만이 전한다. 탁본은 민무늬 비단으로 표구되었고, 상단에는 풍대(風帶)를 부착하였으며, 하단에는 옥축(玉軸)을 달아 마무리하였다. 보존 상태는 우측 상단의 비단이 약간 떨어졌으며, 천리(天裏)에 약간의 얼룩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문효세자의 사후 효창묘가 조성될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 율목동(栗木洞: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내)에 위치하였으며, 일제강점 말기인 1944년 10월 9일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기 전 효창원 안에는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와 그의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의 묘소와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서삼릉내 의령원(懿寧園) 바로 앞에 있다. 서삼릉으로 이전하기 이전 효창묘의 관원으로는 수위관(守衛官: 종9품) 2원이 있었다. 수위관은 충훈부(忠勳府)에서 공신의 적장 자손인 충의위(忠義衛)로써 자벽(自辟)하였으며, 30개월 만에 체임하였다. 자벽은 장관이 임의로 사람을 천거하여 아래 벼슬아치에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 정자각 뒤 분릉에는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마석(馬石) 1쌍, 양석(羊石) 1쌍, 호석(虎石)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소 좌측 아래에 신도비가 있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다. 휘는 순(㬀),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순조의 이복형이다. 1782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 새벽에 정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가 두 살 때 바로 왕세자로 책봉했다.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 미시(未時)에 5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창덕궁의 별당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문효세자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되었다.
‘효창묘비’의 음기를 보면 세자는 정조 6년(1782) 9월 7일 창덕궁의 연화당에서 태어나고, 같은 해 11월 27일에 원자로 정해졌다. 정조 8년(1784) 8월 2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조 10년(1786) 5월 11일에 창경궁의 별당에서 사망하고, 같은 해 윤7월 17일에 고양 율목동에서 장례를 치렀다. 동궁에 3년 있었고 나이는 5세였다. 사망 후 시호(諡號)를 문효(文孝), 묘호(廟號)는 문희(文禧), 묘호(墓號)는 효창(孝昌)이라 하였음을 밝혔다.
장서각에는 같은 해에 건립한 《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명(文孝世子孝昌墓神道碑銘)》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문효세자의 아버지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이성원(李性源)이 글씨를 썼으며, 황경원(黃景源)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의 내용에서 정조는 효장세자의 죽음을 두고 ‘지극한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며 효장세자의 기질과 성품 등을 적어나갔다. 정조의 글에 의하면 세자는 백일이 안 되어서 병풍 속의 글자를 분별하였으며, 자라면서 기완(器玩)에 대해서는 좋아함이 없고 오직 서책을 좋아하였다고 하고, 『천자문』을 주고 빈료(賓僚)를 두었지만 개강(開講)을 허락하지 않았음은 너무 일찍 깨닫는 것이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자가 병고를 겪을 때의 상황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창경궁의 별당에서 병으로 누워있을 때 불을 좌우에 밝혀 두고 잠을 자는데 세자가 부르는 소리를 주위사람들은 잠자느라 알지 못하였지만 정조는 알고서 등불을 얻어서 급히 가서 구완하였다고 하였다. 또 정조는 오직 세자의 병에 대한 근심으로 뒤척이고, 약을 구할 수 없어 차마 그 사별하여야 함에 이르러서는 부모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등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을 절절히 묘사하였다.
[자료적 가치]
문효세자에 대한 정조의 애통함을 확인할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18세기 후반 왕실의 금석문 제작방식과 탁본, 장황방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弘齋全書』 문화재관리국장서각, 1978.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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