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영조대왕관왕묘비[중각](英祖大王關王廟碑[重刻])

자료명 영조대왕관왕묘비[중각](英祖大王關王廟碑[重刻]) 저자 관우(關羽), 이금(李昑), 이금(李昑), 이금(李昑),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42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미상 (현재주소: 미상)
· 작성시기 1785
· 비고 2-5342
1785년(건립)/1900(중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관우(關羽) 미상 - 219 촉(蜀) 무장(武將)
찬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서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전서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정비(廟庭碑)
· 크기(cm) 294.1 X 117.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1730년(영조 6)에 세운 영조(英祖) 어제어필(御製御筆) 관왕묘비(關王廟碑)를 1900년(광무 4)에 중각(重刻)하여 떠낸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영조대왕관왕묘비[중각](英祖大王關王廟碑[重刻])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의 어제어필 관왕묘비를 대한제국기인 1900년(광무 4)에 중각하고 종이에 떠내어 족자로 장황하여 만든 금석문이다. 비문은 1730년(영조 6)에 지어졌으며, 관왕묘 건립의 내력과 의의 및 관왕묘에 대한 감회를 주로 서술하였다. 『열성어제(列聖御製)』에는 「현령소덕무안왕묘기(顯靈昭德武安王廟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본래 비석은 방형(方形) 대석(臺石) 위에 비신(碑身)을,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태로 구성되었다. 숙종의 어제어필이 전면에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 영조의 어제어필이 새겨져 있다.
관왕묘(關王廟)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의 장사 관우(關羽, 162년 경~219)의 충절과 무공을 기리고 향사(享祀)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관왕묘 또는 관제묘(關帝廟), 무묘(武廟)라고도 불린다. 관우는 남송의 악비(岳飛)와 함께 중국 역사상 충절을 지킨 대표적 인물로 일컬어져 왔으며, 송나라 이후로 관제묘를 세워 그의 절의를 숭배하였다. 명나라에서도 관우의 신(神)이 명 태조를 음조(陰助)한 공이 있었다 하여 '무안왕(武安王)'으로 봉해졌고, 청나라에서도 1585년(만력 13)에 '협천대제(協天大帝)'로 봉해졌다. 한편 그는 중국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성제군(關聖帝君)․관보살(關菩薩)’로 불리며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관왕묘비는 ‘관우찬양비(關羽讚揚碑)’ 또는 ‘무안왕묘비(武安王廟碑)’라고 불린다. 숙종과 영조를 비롯해, 사도세자(思悼世子), 정조(正祖) 4대의 어제어필․예제예필(睿製睿筆)이 2기의 비석에 합각(合刻)되어 있다. 숙종의 어제어필 외에 영조의 어제어필 《현령소덕무안왕묘기(顯靈昭德武安王廟記)》가 1730년(영조 6)에, 사도세자 예제예필《무안왕묘비명(武安王廟碑銘)》이 1785년(정조 9)에 세워졌다. 이어 정조 또한 어제어필 《무안왕묘비명(武安王廟碑銘)》을 1785년(정조 9)에 지었다. 숙종과 영조의 글을 하나의 비석에 합각하고, 사도세자와 정조의 글을 다른 하나의 비석에 합각하여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각각 2기씩 세우도록 명하였다. 비석은 현재 남관왕묘에서는 볼 수 없고 동관왕묘에만 남아 있다.
조선에서 관왕묘의 건립은 선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정유재란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의 관우 숭배가 주된 요인이었다. 최초의 관왕묘는 1598년(선조 31)에 숭례문 밖에 건립된 남관왕묘이다. 이것은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인(陳寅)이 관우 혼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명나라의 사신․장수들과 조선 조정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 한양에는 그 다음으로 동관왕묘가 흥인지문(興仁之門) 밖에 건립되었다. 1599년(선조 32)에 완공되었는데, 명나라 신종(神宗)이 ‘왜란 평정에 관우 혼령의 음조가 지대했으므로 공을 갚으라’는 조서(詔書)와 자금을 보내어 관왕묘 건립을 종용함에 말미암을 것이다.
한편 지방에서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에, 1598년 안동(安東)에, 1598년 성주(星州)에, 1599년 남원(南原)에 각각 세워졌다. 고금도 관왕묘의 건립에는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안동은 명나라의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성주는 명나라 장수 아국기(芽國器)가 발의하였다.
관왕묘 건립 이후 명나라의 장수들은 선조에게 관우를 경배하도록 권유하였지만, 선조 및 조선 조정은 관왕묘의 건립과 이에 대한 행례(行禮)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더욱이 동관왕묘 건립 당시 건립비용과 노동력의 손실이 막대하였고, 관련 관리의 비리 또한 큰 문제가 되었다.
관우 숭배가 공식화 된 시기는 숙종 때부터이다. 숙종은 교외로 거둥할 때 여러 번 관왕묘에 친임하였는데, 이 일을 선례로 삼아 후대의 왕들도 교외로 행차하면 자주 관왕묘에 친임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임금의 관왕에 대한 재배례가 공식 의례로 확정되었다. 1739년(영조 15)에는 동관왕묘와 남관왕묘를 중수하였으며, 고금도, 안동, 성주 등 지방의 관왕묘 또한 숙종과 영조 등의 명에 의해 여러 차례 보수․이건하였다. 고종은 1901년(광무 5) 관우를 황제로 승격시키고 ‘관제(關帝)’로 칭하도록 하였다.
장서각에는 《영조대왕관왕묘비》탁본 8점이 전하고 있다. 이 중 2점에는 ‘광무사년경오음력육월중각(光武四年庚午陰曆六月重刻)’이라는 중각기가 덧붙여 있고, 나머지 6점은 원비석의 탁본으로 추정된다. 탁본의 내용은 중각기의 유무를 제외하면 8점 모두 거의 동일하다. 2점의 중각본에는 족자의 사양(四鑲) 좌측에 세로로 중각기가 붙어있다.
탁면의 최상단에는 ‘현령소덕무완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라는 해서 제액이 가로로 씌여 있다. 탁면 우측 첫 줄에는 상단에 세로로 ‘영종현효대왕어제어필(英宗顯孝大王御製御筆)’이라 하여 영조의 어제어필임을 밝혔다. 이것은 원비석의 탁본과 중각비의 탁본이 조금 다르다. 중각기가 있는 2개의 탁본에는 ‘영조현효대왕어제어필(英祖顯孝大王御製御筆)’으로 씌여 있어 묘호(廟號)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해서로 쓴 본문은 기문(記文)과 추록(追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문은 13행 60자로 씌여 있고, 추록은 기문보다 한 자 내려 6행 59자로 되어 있으며, 그 마지막 줄은 한 자를 더 내려 썼다. 대두(擡頭)는 쓰지 않고 격자(隔字)를 써서 존대하였다. 추록 마지막에는 소자쌍행(小字雙行)의 주(註)가 있다.
기문에서는 동․서관왕묘(東․西關王廟) 건립과 관우 숭배의 내력, 관왕묘에서 느끼는 감회와 관우 숭배의 의의 등을 차례로 서술하였다. 영조는 관왕묘에 얽힌 고사를 열람하고 갖은 감회를 3가지 측면에서 기술하였다. 첫째,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기억함이요, 둘째 무안왕(武安王)의 충의(忠義)와 음조(陰助)에 감동함이요, 셋째 자신의 부덕(不德)을 되돌아보며 근심함이다. 이에 더하여 영조는 중국 사신 도양성(陶良性)이 비문을 써서 관우의 무용(武勇)만을 칭송하였을 뿐 그 충의를 일컫지 않았던 일에 유감을 표하였다. 도양성은 명나라 신종(神宗) 때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감생(監生)으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수행했고, 영평부통판(永平府通判)으로 군문(軍門) 형개(邢玠)를 수행하여 두 차례 조선에 건너온 적이 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관우를 존모하는 이유는 숭무(崇武)를 위해서가 아니라 충의를 높이기 위해서임을 천명하였다.
추록에서는 자신이 동묘와 남묘를 각각 3번씩 첨배(瞻拜)했던 일을 추억하고 두 묘에 각각 내린 친필 편액의 생김새와 그에 담긴 의미에 대해 서술하였다. 기문을 보면 영조는 명나라 신종(神宗)이 친필로 ‘현령소덕왕관공지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 써서 내린 편액에 감회가 일어, 친필로 ‘현령소덕무완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여덟 글자를 써서 현판을 만들어 동묘와 남묘에 걸게 하였다. 동묘에 건 현판은 청색 바탕에 홍색 그림을 그려 청사(靑紗)로 보호하였으며, 남묘에 건 현판의 홍색 바탕에 청색 그림을 그려 홍사(紅紗)로 보호하였다. 여기에는 각각 방위의 상징을 나타낸 동시에 상생의 이치를 취한 것이다. 또한 현판의 글씨는 모두 금(金)을 입혔으니, 이것은 명나라가 내린 묘호(廟號)를 높이는 뜻이다. 현재 동묘의 정전 내에 영조 친필로 추정되는 《현령소덕무완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현판이 두 점 걸려 있다.
추록의 마지막 줄에서는 혹시 뒷날 중각(重刻)할 일이 있을까하여 한 본을 찍어 강화도 정족산성에 보관한다는 추기를 덧붙였고, 쌍행의 주에서는 도양성의 비에 비각의 건립을 명하였다는 내용이다.
[자료적 가치]
임진.정유재란 이후 조선에서 관우신앙의 유입과정과 왕실에서 추숭사업의 일단을 엿볼 수 있고, 민간신앙과의 접합과정까지도 엿볼 수 있다. 영조의 어필을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御製』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서울금석문대관』1 서울시 편, 1987.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關王廟建置考」 김용국 『향토서울』25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5.
「19세기 후반 關王 숭배의 확산과 관왕묘 제례의 주도권을 둘러싼 東萊 지역 사회의 동향」 손숙경 『고문서연구』23호, 한국고문서학회, 2003.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