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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군신도비명(恩信君神道碑銘)

자료명 은신군신도비명(恩信君神道碑銘) 저자 이진(李禛),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3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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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양주(楊州) 금촌(金邨) 계암(雞巖) (현재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작성시기 1783
· 비고 2-5330
178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진(李禛) 1755 - 1771 조선 왕족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神道碑)
· 크기(cm) 266 X 18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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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세의 나이로 요절한 왕손(王孫) 은신군(恩信君)의 신도비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은신군신도비명(恩信君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장조(莊祖)에 추존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 1771)의 신도비를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장서각에는 동일한 탁본이 2점 소장되어 있다. 2점 모두 사양(四鑲)에 무늬가 없는 비단을 대어 장황하였는데,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옥색 비단이다. 2점 모두 풍대(風帶)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나 1점은 천리 좌측과 사양 좌측에 얼룩이 몇 군데 있다. 비문의 건립 시기는 1783년(정조 7)이며, 비석을 세운 장소는 양주(楊洲) 금촌(金邨) 계암(雞巖)이다. 탁본의 상단에는 은신군신도비를 지칭하는 두전(頭篆) ‘왕손은신군시소민공신도비(王孫恩信君諡昭愍公神道碑)’가 있으며, 아랫부분의 서(序)와 명(銘)은 해서로 씌였다. 이복형 정조의 어제어필이다.
한편 장서각에는 ‘은신군신도비명’과 동일한 내용의 탁본이 서첩 형태로 2책이 소장되어 있다. 『은신군소민공신도비명(恩信君昭愍公神道碑銘)』(2-4928)은 1첩 12절의 탁인본으로, 비문의 내용은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순(孝順)을 언급한 부분(固有以感其心而苟非孝順之根於)까지만 성첩되어 있다. 『은신군신도비명(恩信君神道碑銘)』(2-4929)은 명문 끝의 7자와 간기가 누락되어 완탁본은 아니지만, 비문의 내용이 명문의 거의 끝부분까지 탁인되어 있다. 다만 간행연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두 자료의 선후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은신군은 영조의 손자로,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은언군(恩彦君)의 친동생이며 은전군(恩全君)의 이복형이기도 하다. 사도세자의 사후 출궁되었으며, 이후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1769년 김귀주(金龜柱) 등이 이를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탄핵,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 다닌다 하여 이복형 은언군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
그는 영조의 명으로 이복형인 은언군과 함께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위리안치 되었다. 그러나 은신군과 그의 형 은언군이 유배당한 뒤에도, 그는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죄목이 더해져 계속 탄핵받았다. 당시 노론 벽파 일각에서는 세손을 제거하려 했고 영조는 이를 알아보고 홍봉한이 은신군과 은언군 형제의 빚을 갚아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형 은언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풍토병에 걸렸고, 유배 2년만인 1771년 음력 3월 29일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정조에 의해 연령군에게 적통(嫡統)으로 입적(入籍)되었으며, 은신군 역시 아들이 없어 1815년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가 양자로 입양되어 후사를 이었다.
은신군묘의 천장(遷葬)과 관련하여 『정조실록』을 살펴보면, 은신군이 사망한 후 정조가 얼마나 상심이 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은신군의 묘를 천장할 때에 왕순의 예를 쓰지 않고 당저(當宁)의 동기 장례의 예를 따를 것을 명할 정도로 후한 장례의식을 베풀었으며, 종친의 품계 가운데 극품(極品)을 추증하게 하는 등 은신군에 대한 예우를 매우 극진히 함으로써 불운하게 사망한 이복동생에 대한 상심을 드러냈다.
이 비문의 도입부에서도 이러한 정조의 상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람의 화복(禍福)은 운명에 달린 것이라 군자는 이를 알고 원망하지 않지만, 지극한 정회(情懷)가 밀려오는 바에야 어찌 서글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제주도 적소에서 불운하게 죽어간 이복동생에 대한 상심을 드러냈다.
이 비문은 장문의 글로, 내용은 대략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은신군의 부모를 기술함과 동시에 정조 자신과의 형제관계를 드러내고, 출생과 관례 및 혼인과 벼슬, 제주 적소에서의 사망 등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다. 둘째, 번잡함을 싫어하는 성품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순(孝順),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에 대해 언급했다. 셋째, 궁중에서 서자의 예에 따른 대접을 받으면서도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검소함으로 스스로 지켜나간 일상의 회고했다. 넷째, 정쟁과 무고로 인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한 은신군의 기구한 삶에 대한 상심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다섯째, 정조 즉위 후 은신군에게 ‘소민(昭愍)’이란 시호를 내린 것과, 장례를 치른 지 13년이 지나서야 비를 세우게 된 경위가 설명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은신군에 대한 정조의 정회와 함께 그의 명복을 기리는 내용의 명(銘)이 있다. 참고로 명의 내용을 번역하여 옮기면 아래와 같다.
아, 은신군이여 / 嗟哉恩信
평소 행동거지가 훌륭했었지 / 素履振振
효도하고 또 우애하고 / 旣孝旣友
공손하고도 신중했었지 / 亦克恭愼
인후하신 왕의 자손으로 / 宜爾麟趾
외로운 섬에 귀양 갔었네 / 乃鵩之賦
화와 복이 그리 무상한 것 / 禍福廻穴
그 까닭을 누가 알까 / 孰識其故
머나먼 남쪽 땅을 / 悠悠南服
가더니 오지를 않고 / 有去無歸
놀란 파도는 하늘에 닿고 / 驚濤黏天
비도 울고 바람도 흐느꼈네 / 雨泣風唏
군자는 말하기를, 아, 슬프다 / 君子曰噫
모두가 명임을 어찌하랴 한다네 / 命也如何
누굴 원망하고 탓하는 게 아니라 / 匪怨匪尤
내 감회가 매우 많다네 / 予懷孔多
경기 지역으로 반장하여 / 返葬于畿
우리 대궐과도 가까이 있고 / 邇我城闕
작록도 회복되고 / 爵旣恩復
시호도 내려지고 위계도 올랐으니 / 易名增秩
그대 넋이여, 무슨 유감 있겠는가 / 魂兮奚憾
이 집 속에 고이 잠들게나 / 安此幽宮
이 비에다 사연을 새겨 / 立石鐫辭
슬픈 이 심정을 엮었다네 / 維以紓恫
[자료적 가치]
은신군의 생애와 가계, 형제에 대한 정조의 시각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정조의 어필 가운데 소자해서(小子楷書)를 감상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은신군소민공신도비명(恩信君昭愍公神道碑銘)』(2-4928)
『은신군신도비명(恩信君神道碑銘)』(2-492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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