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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송시열신도비명(文正公宋時烈神道碑銘)

자료명 문정공송시열신도비명(文正公宋時烈神道碑銘) 저자 송시열(宋時烈),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3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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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북도 괴산 (현재주소: 충청북도 괴산군)
· 작성시기 1779
· 비고 25336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송시열(宋時烈)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명(神道碑銘)
· 크기(cm) 282.6 X 105.0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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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우암 송시열의 신도비명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문정공송시열신도비명(文正公宋時烈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가 세운 묘비의 탁본이다. 비문의 건립 시기는 1779년(정조 3)이고 위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이다. 송시열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주자학의 대가로 노론의 영수였다. 숙종 15년에 장희빈의 아들(후일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았다. 처음에 수원의 무봉산에 장사지냈다가 숙종 23년(1697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로 이장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로 썼으며 탁본의 전면 오른쪽 상단에 전서로 작게 ‘어필(御筆)’이라 썼으며, 음기의 상단은 대자로 쓴 ‘어제(御製)’라는 전서 제액이 있다. 탁본의 전면에는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으로 대자(大字)를 썼는데, 선현을 추모하는 정조의 의지를 보인 것이라 짐작된다.
이 호칭과 관련한 기사가 실록에 보인다. 『정조실록』 3년 11월 7일조를 보면 사학유생(四學儒生) 홍낙겸(洪樂謙) 등이 송시열의 묘비에 어필로 다시 써서 주도록 상소한 대목이 있다. 이 내용에 의하면 정조가 이미 송시열의 묘비에 ‘배신(陪臣)’과 ‘선생(先生)’이라 쓴 대자를 각각 써주어 2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배신’이라고 쓴 본은 궐내로 다시 회수하도록 하였다. 이에 홍낙겸 등이 상소를 올려 ‘배신’이라는 본을 대자로 다시 써줄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윤호를 받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이 비의 건립 시기가 1779년(정조 3)인 점을 감안할 때 정조가 써주었다는 2본은 동년 11월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며, 이 묘비는 그 중에 한 본일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의 내용은 우선 송시열의 생몰년을 기술한 것으로 시작하여 관력과 시호에 대해 언급하고, 효종조에서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위해 분발하였던 송시열의 업적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송시열의 묘에 사호 비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옛날의 제왕은 공훈이 있는 구신(舊臣)을 위해 몸소 비문의 전액을 썼다.”는 정신(廷臣)의 말에 따라 정조가 송시열의 비문을 직접 짓고 쓰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끝에는 송시열이 이이를 비롯하여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은 사실을 언급하며, 짧은 명문과 함께 끝을 맺었다.
명문의 내용 가운데 “교서를 받들어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정조가 이 비문을 쓰기에 앞서 안진경의 글씨로 집자하도록 명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역대 열성의 어필은 조맹부체의 유연한 서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조의 어필에서 조맹부체의 연미한 필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왕희지체를 근간으로 하여 안진경의 서풍을 가미하는 특징을 보인다. 정조가 안진경의 글씨로 집자하도록 명을 내린 것은 이전의 부드러움만을 추구하는 서풍에서 탈피하여 후박하면서 기상이 있는 글씨를 추구하고자 했던 정조의 서예관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탁본은 역사 연구를 위한 사료보다 서예사적 가치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서체반정을 주도한 정조의 서예에 대한 인식과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尤庵先生年譜』(장서각 2-792) 『한국금석문대계』2 / 조동원 /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1.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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