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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최씨본댁비[조고비](淑嬪崔氏本宅碑[祖考妣])

자료명 숙빈최씨본댁비[조고비](淑嬪崔氏本宅碑[祖考妣]) 저자 최태일(崔泰逸), 장씨(張氏), 미상, 이요(李橈),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2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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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미상 (현재주소: 미상)
· 작성시기 1744
· 비고 2-5324-1, 2-5324-2
174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최태일(崔泰逸) 미상 - 미상 숙빈최씨조부(淑嬪崔氏祖父)
피전자 장씨(張氏) 미상 - 미상 숙빈최씨조모(淑嬪崔氏祖母)
찬자 미상
서자 이요(李橈) 미상 - 미상 조선 종실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197.3/음기197.0 X 전72.3/음기72.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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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44년(영조 20) 숙빈 최씨의 조고(祖考) 최태일(崔泰逸))과 조고비(祖考妣) 광평장씨(廣平張氏)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숙빈최씨본댁비[조고비](淑嬪崔氏本宅碑[祖考妣])
[내용 및 특징]
탁본은 격자문, 화문의 비단 족자로 장황하였다. 풍대(風帶)와 목축(木軸)이 갖추어져 있고 보존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서체는 전면과 음기가 모두 해서체로 씌였으며 인성군(仁城君) 이요(李橈)의 글씨이다.
외태일은 숙빈 최씨의 조부이다. 그는 생존 당시에 벼슬을 못한 선비였으나, 외손자 영조가 왕으로 등극한 후 1744년(영조 20) 이조판서로 추정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 추숭사업을 이해하는 단편적인 예로서, 자손이 왕가에 들면 그 조상까지도 증직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비문의 전면에는 국명과 최태일의 추증된 벼슬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적혀 있고, 부인 ‘정경부인 광평장씨(貞敬夫人 廣平張氏)’가 함께 합장되었음을 기록하였다. 음기는 숙빈 최씨의 조부 최태일이 영조의 특명으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최태일의 자손에 추증된 벼슬을 나열하였다.
숙빈 최씨는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의 딸로, 일곱 살에 궁에 들어가 1693년(숙종 19) 숙원(淑媛)에 봉해졌고,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이듬해 왕자 연잉군을 생산하고 이 해 숙의(淑儀)에 올랐으며, 이듬해 귀인(貴人)으로 승자(陞資)되었다. 연잉군은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21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영조이다. 1699년(숙종 25) 내명부 정1품인 숙빈에 올랐다. 1718년(숙종 44) 3년간 앓아온 병이 위중해져 궁을 나와 창의동 사제에서 요양하다가 결국 3월 9일 사망하였는데, 이때 나이 49세였다. 소생으로는 왕자 세 명이 있었지만 첫째와 막내는 일찍 죽고 둘째 왕자가 후에 영조가 되었다. 숙빈 최씨가 사망하자 숙종은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제수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는 등 직접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해 5월 12일 양주(楊州 )에서 예정하고 9월에 묘비를 세웠다.
숙빈 최씨의 부친이자 최태일의 아들인 최효원은 숭정(崇禎) 무인년(戊寅年) 2월 20일에 태어나, 임자년(壬子年) 8월 15일 사망하여 향년 35년이다. 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로 추증되었다. 부인 남양홍씨는 숭정(崇禎) 기묘년(己卯年) 10월 17일 태어나 계축년(癸丑年) 12월 18일 사망하여 향년 35세이며, 후에 남편의 추증과 함께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후(垕)는 만호(萬戶)를 지냈고, 장녀는 부사(府使) 서전(徐專)에게 출가하고, 둘째가 숙빈 최씨이다. 최효원은 본래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과(宣略將軍行忠武衛副司果)를 지냈으나, 이후 외손자인 영조가 등극자하 1734년 추증되었다.
글씨를 쓴 이요(李橈, 생몰년 미상)는 선조(宣祖)의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증손이다. 종실이면서도 서민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학문이 깊고 달변이었다고 한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시로 그 자문에 응하여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사은사 겸 진주사로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와 왕으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고, 점차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교만해져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사치를 하자 대사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요는 당시 종실의 금석문을 비롯하여 책보(冊寶) 등을 많이 썼던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전반 선조계(宣祖系) 종친들 중 글씨를 가장 잘 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왕실 편찬업무에 수시로 차출되어 『선원록』과 『국조어첩』 등의 자료를 필사했으며, 궁궐의 현판과 왕족들의 묘비명을 도맡아 썼다. 특히 송설체에 특장이 있어 명성이 있었던 듯, 이규상(李奎象)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종친 가운데 서평군 이요가 있는데, 지위는 일품으로 촉체를 잘 써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왕실의 문자를 많이 써서 작위가 오르고, 상을 많이 받아 이로 인해 영조의 지우를 입어 마침내 종친의 수반에 올랐다.”고 기록하였다.
숙빈 최씨 본택 관련 금석문은 이 외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증한 사례(《(淑嬪崔氏本宅碑)(考妣))와 증조와 증조할머니를 추증한 사례(《(淑嬪崔氏本宅碑)(曾祖考妣))가 장서각에 탁본으로 전한다.
[자료적 가치]
영조의 사친에 대한 효성이 숙빈 최씨의 선대에까지 미친 사례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京畿金石大觀』 경기도, 1982~199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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