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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최씨본댁비[고비](淑嬪崔氏本宅碑[考妣])

자료명 숙빈최씨본댁비[고비](淑嬪崔氏本宅碑[考妣]) 저자 최효원(崔孝元), 홍씨(洪氏), 미상, 이요(李橈),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23-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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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미상 (현재주소: 미상)
· 작성시기 1734
· 비고 2-5323-1, 2-5323-2
173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최효원(崔孝元) 1638 - 1672 숙빈최씨부(淑嬪崔氏父)
피전자 홍씨(洪氏) 1639 - 1673 숙빈최씨모(淑嬪崔氏母)
찬자 미상
서자 이요(李橈) 미상 - 미상 조선 종실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전184.0/음기183.8 X 전63.0/음기63.4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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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34년(영조 10) 숙빈 최씨의 부친 최효원(崔孝元)과 모친 남양홍씨(南陽洪氏)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숙빈최씨본댁비[고비](淑嬪崔氏本宅碑[考妣])
[내용 및 특징]
이 탁본은 격자문 화문의 비단족자로 장황하였으며, 풍대(風帶)와 목축(木軸)이 갖추어져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찬자는 미상이며 글씨는 전면과 음기를 모두 이요(李橈)가 썼다. 전면에는 대자해서로 ‘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최공휘효원지묘(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崔公諱孝元之墓’가 우측에, ‘정경부인남양홍씨부(貞敬夫人南陽洪氏祔)’가 좌측에 씌여 있다. 음기에는 1734년(영조 10) 2월 18일에 최효원에게 추증된 벼슬이름과 함께 최효원의 부친, 모친을 포함하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추증한다는 내용이다.
숙빈 최씨는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의 딸로, 일곱 살에 궁에 들어가 1693년(숙종 19) 숙원(淑媛)에 봉해졌고,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이듬해 왕자 연잉군을 생산하고 이 해 숙의(淑儀)에 올랐으며, 이듬해 귀인(貴人)으로 승자(陞資)되었다. 연잉군은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21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영조이다. 1699년(숙종 25) 내명부 정1품인 숙빈에 올랐다. 1718년(숙종 44) 3년간 앓아온 병이 위중해져 궁을 나와 창의동 사제에서 요양하다가 결국 3월 9일 사망하였는데, 이때 나이 49세였다. 소생으로는 왕자 세 명이 있었지만 첫째와 막내는 일찍 죽고 둘째 왕자가 후에 영조가 되었다. 숙빈 최씨가 사망하자 숙종은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제수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는 등 직접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해 5월 12일 양주(楊州 )에서 예정하고 9월에 묘비를 세웠다.
최효원은 숭정(崇禎) 무인년(戊寅年) 2월 20일에 태어나, 임자년(壬子年) 8월 15일 사망하여 향년 35년이다. 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로 추증되었다. 부인 남양홍씨는 숭정(崇禎) 기묘년(己卯年) 10월 17일 태어나 계축년(癸丑年) 12월 18일 사망하여 향년 35세이며, 후에 남편의 추증과 함께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후(垕)는 만호(萬戶)를 지냈고, 장녀는 부사(府使) 서전(徐專)에게 출가하고, 둘째가 숙빈 최씨이다. 비문에서는 이어 손자와 외손의 성명과 벼슬까지 기록하였다.
최효원은 본래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과(宣略將軍行忠武衛副司果)를 지냈으나, 이후 외손자인 영조가 등극자하 1734년 추증되었다. 최효원의 부친은 최태일(崔泰逸)이고, 모친은 평강장씨(平康張氏 )이다. 최태일은 살아생전 벼슬하지 못하였다. 최효원의 조부 최말정(崔末貞)은 통정(通政)을 역임하였다. 최효원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은평구 진관외동 산101-1에 있으며, 그의 묘소 주변에는 손자 최수강, 장인 홍계남, 홍계웅 일가의 묘소가 근교에 있다. 아버지 최태일과 할아버지 최말정의 묘소는 은평구 불광2동 산10-1번지에 있다.
글씨를 쓴 이요(李橈, 생몰년 미상)는 선조(宣祖)의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증손이다. 종실이면서도 서민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학문이 깊고 달변이었다고 한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시로 그 자문에 응하여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사은사 겸 진주사로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와 왕으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고, 점차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교만해져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사치를 하자 대사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요는 당시 종실의 금석문을 비롯하여 책보(冊寶) 등을 많이 썼던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전반 선조계(宣祖系) 종친들 중 글씨를 가장 잘 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왕실 편찬업무에 수시로 차출되어 『선원록』과 『국조어첩』 등의 자료를 필사했으며, 궁궐의 현판과 왕족들의 묘비명을 도맡아 썼다. 특히 송설체에 특장이 있어 명성이 있었던 듯, 이규상(李奎象)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종친 가운데 서평군 이요가 있는데, 지위는 일품으로 촉체를 잘 써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왕실의 문자를 많이 써서 작위가 오르고, 상을 많이 받아 이로 인해 영조의 지우를 입어 마침내 종친의 수반에 올랐다.”고 기록하였다.
숙빈 최씨 본택 관련 금석문은 이 외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추증한 사례(《(淑嬪崔氏本宅碑)(祖考妣))와 증조와 증조할머니를 추증한 사례(《(淑嬪崔氏本宅碑)(曾祖考妣))가 장서각에 탁본으로 전한다.
[자료적 가치]
영조의 사친에 대한 효성이 숙빈 최씨의 선대에까지 미친 사례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京畿金石大觀』 경기도, 1982~199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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