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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묘비(延齡君墓碑)

자료명 연령군묘비(延齡君墓碑) 저자 이훤(李昍), 이돈(李焞), 이요(李橈), 미상
자료명(이칭) 숙종대왕명릉[합부]비(肅宗大王明陵[合祔]碑) 저자(이칭) 이돈(李焞)|민씨(閔氏)|미상|미상|미상|미상
청구기호 K2-5326-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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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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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현재주소: 미상)
· 작성시기 1718
· 비고 2-5326-1
1718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훤(李昍) 1699 - 1719 조선 왕족
찬자 이돈(李焞) 1661 - 1720 조선 왕족
서자 이요(李橈) 미상 - 미상 조선 종실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221.2 X 71.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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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21세의 나이로 요절한 연령군(延齡君)의 묘비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연령군묘비(延齡君墓碑)
[내용 및 특징]
숙종의 여섯째 아들 연령군을 기리기 위해 1719년(숙종 45)에 세운 묘비의 탁본이다. 전면은 없고 음기만이 남아 있다. 글은 숙종이 짓고, 글씨는 서평군 이요(李橈)가 썼다. 탁본은 무늬 없는 비단으로 장황된 족자의 형태이다. 풍대(風帶)가 없고, 목축(木軸)으로 마무리하였다. 천리(天裏), 지리(地裏), 사양(四鑲)의 구분 없이 간략하게 장황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연령군의 출생과 성장, 모친 명빈박씨((示+冥)嬪朴氏)의 죽음, 봉군(封君), 관례(冠禮), 행궁례(行宮禮), 숙종에 대한 시탕(侍湯), 세자의 질병과 후사 없는 죽음, 밀풍군(密豊君) 아들의 양자, 입비(立碑) 등이 기재되어 있다.
연령군의 이름은 훤(昍)이고, 어려서 이름은 인수(仁壽)였다.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1699년 6월에 창경군의 집복헌에서 태어난 연령군은 5세에 어미니 명빈박씨가 사망하였고, 이 해 군(君)으로 봉해져 종친부사(宗親府事)를 맡았다. 8세인 1706년 관례를 치렀고, 9세에 상산(商山) 김동필(金東弼)의 딸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세자가 아닌 까닭에 궁궐의 법도에 따라 1715년에 궁궐 밖의 집에서 생활하며 종부시사옹원도제거(宗簿寺司饔院都提擧)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다. 이 무렵 숙종의 질환 때문에 궁궐에 오래 머물면서 시탕(侍湯)하였으며, 1719년 9월 병으로 궁궐을 나와 재동(齋洞) 집으로 돌아와서 치료받다가 10월 2일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때 군부인(郡夫人)이 충격으로 유산하여 자식이 없게 되자 밀풍군의 둘째 아들로 하여금 계승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예장을 치렀다.
연령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외모가 뛰어났으며 기풍이 단아하고 자애롭고 공손하였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숙종이 몸이 불편하면 반드시 밤에 촛불을 켜고 잠자지 않다가 숙종이 잠들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글씨를 쓴 이요(李橈, 생몰년 미상)는 선조(宣祖)의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증손이다. 종실이면서도 서민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학문이 깊고 달변이었다고 한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시로 그 자문에 응하여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사은사 겸 진주사로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와 왕으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고, 점차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교만해져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사치를 하자 대사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요는 당시 종실의 금석문을 비롯하여 책보(冊寶) 등을 많이 썼던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전반 선조계(宣祖系) 종친들 중 글씨를 가장 잘 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왕실 편찬업무에 수시로 차출되어 『선원록』과 『국조어첩』 등의 자료를 필사했으며, 궁궐의 현판과 왕족들의 묘비명을 도맡아 썼다. 특히 송설체에 특장이 있어 명성이 있었던 듯, 이규상(李奎象)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종친 가운데 서평군 이요가 있는데, 지위는 일품으로 촉체를 잘 써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왕실의 문자를 많이 써서 작위가 오르고, 상을 많이 받아 이로 인해 영조의 지우를 입어 마침내 종친의 수반에 올랐다.”고 기록하였다.
비문에 쓰인 서체는 전형적인 송설체로 고려 말에 수용된 이후 조선 초에 일대 성행하였다가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점차 쇠퇴하였지만 왕실 등에서 지속적으로 쓰였다. 비문의 글씨는 초기의 송설체보다 필획이 두터우며 전반적으로 자형의 짜임새가 안정되어 있다. 조선 후기 송설체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묘비는 198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소재지는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 있다. 처음에는 연령군의 묘소와 비석이 동작구 대방초등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묘소는 이미 1940년 경성지구의 구역정리사업으로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옮겨졌다. 참고로 규장각에 연령군의 신도비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연령군의 생애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조선 후기에 송설체로 이름을 떨친 서평군 이요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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