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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부원군묘비(光城府院君墓碑)

자료명 광성부원군묘비(光城府院君墓碑) 저자 김만기(金萬基), 김진구(金鎭龜), 김진규(金鎭圭),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3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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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군포 (현재주소: 경기도 군포시)
· 작성시기 1699
· 비고 25338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김만기(金萬基)
김진구(金鎭龜)
김진규(金鎭圭)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195.9 X 59.5
· 판본 첩장본(帖裝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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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묘비문(墓碑文)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광성부원군묘비(光城府院君墓碑)
[내용 및 특징]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 1633~1687) 묘비의 탁본이다. 묘비의 건립 시기는 비문의 끝에 간기가 있어 1699년(숙종 25)임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에는 묘의 위치가 적혀 있지 않지만, 송시열이 쓴 「신도비명(神道碑銘)」에 ‘광주(廣州) 속달리(速達里) 여치부임지원(藘峙負壬之原)’ 이라 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번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묘역은 경기도기념물 제 131호로 지정되었다.
장서각에 소장된 탁본은 전면과 음기가 각각 동일본이 2점 소장되어 있다. 모두 족자로 장황하였다. 천리(천장)과 지리(마루)는 청색비단을 댔으며, 사양(기둥)은 흑색 비단을 대었다. 탁본면 상하에 구름문 옥색 비단 띠를 둘러 삼색비단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동일 본 가운데 음기에 해당하는 1점은 탁본면의 몇 군데가 박락되었다. 박락이 보이는 1점은 옥축을 사용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목축이다. 서체는 전면에 ‘어필(御筆)’ 두 자만 전서로 썼고 나머지는 해서이다. 음기는 예스로 쓰였다. 전면의 대자는 숙종의 어필이다.
김만기는 송시열의 문인으로 1652년(효종 3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수찬(修撰)·정언(正言)·교리(校里)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현종 12년)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으며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庚辛煥局) 때 훈련대장으로서 역모사건을 다스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비문의 찬자 김진구(金鎭龜, 1651~1704)로, 아버지는 이 비문의 피전자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이고, 어머니는 서원부부인 한씨로 군수 한유량의 딸이다. 그의 누이동생은 숙종비 인경왕후이다. 자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이다. 김진구가 지은 「묘표(墓表) 어필대자(御筆大字)」가 그의 문집 『서석집(瑞石集)』에 전하는데, 이 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비문에서는 비석을 세운 일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즉 부친인 광성부원군 김만기가 사망하였을 때에 숙종이 관아의 비용을 내어 장례를 도왔을 뿐 아니라 표석을 세울 돌까지 하사하였으며, 스승 송시열에게 글을 받아 비를 세웠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송시열이 지은 장문의 신도비명과 묘표음기가 김만기의 문집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세웠던 비문은 이 신도비명과 묘표음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부친의 직위가 복직되고, 숙종이 어필로 묘표 대자를 써주는 은혜를 입어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을 기술하였다. 끝부분에 ‘전서로 표액하여 어필임을 기록하고 이어 그 전말을 아울러 배면에 기록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전면에 쓴 ‘어필(御筆)’ 두 글자는 숙종의 글씨가 아니라 김진규가 썼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김만기의 문집 『서석집』 권17, 부록에는 숙종이 김만기의 화상(畵像)을 보고 감회를 표한 「복훈후어제화상찬(復勳後御製畫像贊)」과 김창협, 오도일, 송상기의 「사제문(賜祭文)」, 송시열이 지은 장문의 신도비명과 묘표음기, 이민서의 제문이 차례로 실려 있으며, 김진규의 문집 『죽천집』에는 「가장(家狀)」이 수록되어 있어 김만기의 가계 및 생평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비문의 글씨를 쓴 이는 김진구의 동생 김진규(金鎭圭, 1658~1762)로 추정된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는 김진규가 양주 김수증의 묘포와 광주 김만기의 묘비 이외에 여러 비갈의 글씨를 썼다는 『해동금석총목』의 내용을 인용, 수록하였다. 또한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쓴 「중부죽천부군자서총론(仲父竹泉府君自敍總論)」에 의하면 김진규가 자신의 글씨에 대해 ‘글자의 획이 단정하고 굳세고 전서와 예서에 모두 뛰어났다.’고 자부한 내용이 있는데, 광성부원군묘비 역시 전서와 예서에 능하여 다수의 비문을 남긴 김수증의 필법을 전수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비석의 글씨는 김만기의 첫째아들 김진구가 짓고, 둘째 아들 김진규가 썼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료적 가치]
이 금석문은 피전자, 찬자, 서자가 모두 한 집안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글씨는 숙종의 어필뿐 아니라 김수증으로부터 이어지는 조선 후기 예서의 서맥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서예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서석집(瑞石集)』(한국문집총간 144․145) / 김만기 / 민족문화추진회, 1995 『죽천집(竹泉集)』(한국문집총간 174) / 김진규 / 민족문화추진회, 1996. 『북헌집(北軒集)』(한국문집총간 185) / 김춘택 / 민족문화추진회, 1997. 『근역서화징』 / 오세창 / 시공사, 1998.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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