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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부원군묘비(淸風府院君墓碑)

자료명 청풍부원군묘비(淸風府院君墓碑) 저자 김우명(金佑明), 미상, 이순(李焞),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3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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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강원도 춘천 (현재주소: 강원도 춘천시)
· 작성시기 1687
· 비고 25337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김우명(金佑明)
미상
이순(李焞)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판본 첩장본(帖裝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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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1619~1675)의 묘비문(墓碑文)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청풍부원군묘비(淸風府院君墓碑)
[내용 및 특징]
현종(顯宗)의 장인이자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인 현풍부원군 김좌명의 묘비문 탁본으로, 본래 전면과 음기가 있었으나, 현재 전면만 전한다. 전면의 글씨는 숙종의 어필이다.
탁본면의 가장자리에 무늬 없는 비단을 대어 족자로 장황하였다. 축은 목축(木軸)을 사용하였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서체는 조맹부체를 기반으로 한 숙종의 유려한 해서체이다. 군데군데 행서의 운필을 섞어 유동성을 한층 배가시켰다. 숙종은 역대 열성 가운데 조맹부체인 촉체(蜀體)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자료와 관련하여 이민서(李敏敍, 1633~1688)가 지은 《청풍부원군김공신도비명병서(淸風府院君金公神道碑銘幷序)》가 있다. 이 금석문은 강원도 춘천에 있는 김우명의 신도비로 이민서가 짓고 윤심(尹深)이 썼으며 김만중(金萬重)이 전서(篆書)를 써서 1687년 11월에 세운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 현재 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공(公)의 부인 덕은부부인(德恩府夫人) 송씨는 전주부윤(全州府尹) 국택(國澤)의 딸로, 간결숙철(簡潔淑哲)하여 선비다운 행의가 있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모셨으며, 시누이를 대할 때도 일체 흠잡는 말이 없었다. 공보다 15년 앞서 졸하였다. 처음엔 양주(楊州) 문곡리(文谷里)에 묻혔는데, 나중에 강원도(江原道) 춘천부(春川府) 치서안부역촌(治西安保驛村) 좌해원(坐亥原)으로 이장하였다. 공이 죽자 그해 10월에 합장하였다.”
위의 글을 통해 춘천부 치서안보역촌에 부인 송씨와 함께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현재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1리 산25-1에 해당하는 곳이며, 묘역은 강원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건립연대 역시 이민서의 글을 통해 확인된다.
“청풍부원군 김공이 죽은 지 이미 13년이 되었다. 묘목(墓木)이 아름다리 자랐건만 묘비는 아직껏 세워지지 않았다... 우리 성상께서 그 오래되고 징험할 바가 없어져 후인들이 까맣게 잊어버릴까 염려하였다. 이에 공의 아들 청풍부원군 석주(錫冑)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비명을 지을 것을 명하셨다.”
청풍부원군이 1675년(숙종 1)에 죽었으므로, 13년이 지난 1687년에 와서야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御筆’이라고 작게 쓴 아래에 ‘德恩府夫人宋氏祔左 國舅淸風府院君 諡忠翼金公之墓’라는 내용의 글씨를 썼는데, 이민서가 신도비명을 쓰게 된 정황과 내용이 잘 부합한다. 현재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춘천 안보리에 이민서가 글을 짓고, 윤심이 글을 짓고, 김만중이 전액(篆額)을 쓴 신도비가 서있다.
피전자 김우명(1619~1675년)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정(以定),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영의정인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강릉참봉(江陵參奉),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역임하였다. 1652년(효종 2년)에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으며 이듬해 평시서 영(平市署令)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겸 상의원(尙衣院), 사도시(司䆃寺), 장악원(掌樂院), 빙고(氷庫) 등의 제거(提擧)와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제수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 민신(閔愼)의 대부복상(代父服喪) 문제로 남인을 귀양 보내고 숙종 초년에 복창군(福昌君)과 복평군(福平君) 형제의 행패를 논핵하다가 남인과의 알력이 심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세상을 떴다.
[자료적 가치]
김우명의 가계와 행적, 성품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예론(禮論)을 둘러싼 남인과 서인의 갈등을 비롯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또한 비문의 글씨를 통해 숙종 제위 전반기의 어필을 살피기에 적합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 실측조사보고서』 / / 종합검축사사무소 대연건축 편, 춘천시, 2001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西河集』(한국문집총간 144) / 李敏敍 / 민족문화추진회, 1995. 『춘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한림대학교 박물관 편 / 춘천군, 199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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