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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묘신도비명(昌嬪墓神道碑銘)

자료명 창빈묘신도비명(昌嬪墓神道碑銘) 저자 안씨(安氏), 신정(申晸), 이정영(李正英), 이항(李杭),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21-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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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 작성시기 1683
· 비고 2-5321-1, 2-5321-2
168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안씨(安氏) 1499 - 1549 조선 후궁(後宮)
찬자 신정(申晸) 1628 - 1687 조선 문신
서자 이정영(李正英) 1616 - 1686 조선 문신
전서자 이항(李杭) - 1701 조선 종실(宗室)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神道碑)
· 크기(cm) 중246.7/하242.0 X 중82.5/하82.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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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선조(宣祖)의 조모(祖母)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신도비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창빈묘신도비명(昌嬪墓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4대 국왕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씨를 기리기 위해 1683년(숙종 9)에 조성한 신도비이다. 창빈의 묘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내에 있다. '창빈안씨신도비'는 본래 4면에 걸쳐 새겨졌으며, 탁본 또한 4본이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 장서각에 전하는 탁본은 뒷부분의 2본만 전한다.
그 중 청구기호 2-5321-1은 중간 부분에 구름문 비단표구이며 풍대(風帶)가 있었으나 결락되었다. 축은 나무로 되어 있고 맨 위의 전액 부분은 ‘신도(神道)’ 두 글자가 있다. 아랫부분은 해서체로 씌여 있다. 보존상태는 탈색과 얼룩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고 탁면의 두 글자가 결락된 상태이다. 청구기호 2-5321-2의 장황상태는 대체적으로 위와 같으나 전액 부분에 ‘비명(碑銘)’의 글자가 있다.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된 창빈묘신도비 탁본은 완본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전액은 ‘창빈이씨신도비명(昌嬪李氏神道碑銘)’ 여덟 글자를 각 면에 두 글자씩 네 면에 걸쳐 새겨놓았다. 제목 부분에서는 ‘유명조선국창빈안씨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昌嬪安氏神道碑銘 幷序)’라고 해서로 썼다. 이후 비문의 찬자(撰者), 서자(書者), 전서자(篆書者)의 관직과 이름을 나열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창빈 안씨가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중종(中宗)의 계비가 된 후 영양군(永陽君) 거(岠)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 등 2남과 정신옹주(靜愼翁主) 1녀를 둔 내용, 영양군은 찬성(贊成)으로 추정된 안세형(安世亨)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은 두지 못했다는 내용, 둘째아들인 덕흥대원군은 영의정 판중추부사를 추증받은 정세호(鄭世虎)의 딸과 결혼해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아들이 국왕(선조)에 등극함에 따라 창빈으로 추존되었다는 내용, 그밖에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주이씨 덕흥대원군파 족보에 의하면 창빈 안씨는 1499년(연산군 5) 시흥에서 우의정을 추증받은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나 1549년(명종 4) 10월에 51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장흥에 장례지냈으나 이듬해 3월 동작릉으로 천장하였다. 본래 후궁의 원묘였으나 선조 이후 창빈의 현손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예외적으로 신도비를 세우고 봉분 뒤에 곡장을 둘렀다. 또한 혼유석(魂遊石), 석등(石燈), 호석(虎石) 등 왕릉과 유사한 양식을 갖추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1676년(숙종 2) 5월에 종신(宗臣) 한평부수(漢平副守) 이연(李演)이 창빈의 묘에 수호군을 두기를 청하고 ‘창빈은 바로 선조의 사친인 덕흥대원군의 어머니인데, 효종조에 대신들과 의논하여 불천위로 하였다. 묘는 과천에 있다.’고 보고하였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본래의 묘소는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조성하였으나, 이듬해에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현재 묘소에는 담장이 둘려져 있고 묘 앞에는 묘갈ㆍ석등ㆍ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1683년(숙종 9) 12월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현재 묘소의 서쪽 비탈 10여 미터 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 기둥형으로 제작하였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전액은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비문을 지은 신정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동(伯東), 호는 분애(汾厓)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흠(欽)이고, 아버지는 참판 익전(翊全)이며, 어머니는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고루 지냈는데, 바른 정사로 일세의 추중(推重)을 받은 이름난 재상이었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관각(館閣)의 전책(典冊)이나 국가의 금석문자를 찬술한 것이 많다. 특히 시에 뛰어나 격조가 청절(淸絶)하다는 평을 받았다.
비문의 글씨를 쓴 이정영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이다. 수광(秀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간(惟侃)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 경직(景稷)이며, 어머니는 첨지 오경지(吳景智)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가 심양(瀋陽)으로 갈 때 사서로 시종했으며 귀국해 정언·수찬·응교·검열·대교·봉교·전적을 역임하였다. 1642년 예조좌랑을 거쳐 1649년 효종이 즉위한 뒤 다시 정언·교리·헌납 등을 지냈다. 글씨에 매우 뛰어났는데 특히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능했다. 그가 쓴 금석문은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이순신명량대첩비(李舜臣鳴梁大捷碑)》·《영안위홍주원비(永安尉洪柱元碑)》·《호판이경직비(戶判李景稷碑)》·《판추김시양비(判樞金時讓碑)》·《감사강홍중비(監司姜弘重碑)》·《형참이소한비(刑參李昭漢碑)》·《정여창비(鄭汝昌碑)》·《예참홍주국비(禮參洪柱國碑)》 등 다수가 전한다.
전서자 이항은 조선 후기의 종실로, 할아버지는 인조이고 아버지는 숭선군(崇善君) 징(徵)이다.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다. 1687년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가 되었고, 같은 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1년 신사(辛巳)의 옥이 일어나 희빈 장씨가 사사되고 평소 장씨 일가와 친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또한 비(婢) 숙정(淑正)을 양인으로 속량시켜 희빈의 오빠인 희재(希載)에 보내어 심복으로 삼도록 한 사실이 드러나 결국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자료적 가치]
왕실 여성의 사후 추숭과정을 금석문의 입비(立碑)와 관련 석물의 조영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서예로 유명한 이정영의 서체를 감상할 수 있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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