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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묘지문(昭顯世子墓誌文)

자료명 소현세자묘지문(昭顯世子墓誌文) 저자 이왕(李炡), 이식(李植), 조문수(曹文秀),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22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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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시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
· 작성시기 1645
· 비고 2-5322
164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왕(李炡) 1612 - 1645 조선 왕족
찬자 이식(李植) 1463 - 1502 조선 문신
서자 조문수(曹文秀) 1590 - 1647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148.7 X 89.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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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묘지문(墓誌文)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소현세자묘지문(昭顯世子墓誌文)
[내용 및 특징]
지문(誌文)은 사자(死者)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서, 판석(板石)인 지석(誌石)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으며, 매립한 이후에는 탁본이 불가능하므로 그 직전에 일반적으로 인출(印出)하였다. 따라서 지문을 탁본한 시기는 대부분 능을 조성한 시점과 일치한다. 소현세자묘지문 탁본은 소현세자의 장례 때인 1645년(인조 23) 6월에 탁본한 것이 된다. 소현세자묘의 현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이다.
족자의 장황형식은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국화문양이 들어간 남색 비단을 대었으며, 탁면 주변의 사양(四鑲)에는 문양이 없는 미색 비단을 붙였다. 국화문은 섬세하게 도안된 형태가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장식효과를 더해주는데, 지리에는 문양 일부가 마멸된 상태이다. 천리에는 풍대(風帶)를 부착하지 않았고, 지리의 아래 단에는 향나무축을 달았다.
소현세자의 이름은 왕(炡)이며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부인은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이고 보통 강빈(姜嬪)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9년간 심양(瀋陽)의 세자관(世子館)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군량․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 등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대부분의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1640~1642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고, 1644년 청나라 도르곤(多爾袞)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갔다. 베이징에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당시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인지 그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에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면서 환심을 얻었는데, 그들은 그를 ‘소군(少君)’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자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게다가 인조를 폐위시키고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옹립하려는 역모가 일어나자 인조의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소현세자는 베이징에 머문 지 두어 달이 지난 1644년 11월 26일 볼모에서 풀려났으며 1645년 2월 18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같이 볼모로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에 비해 청나라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새로운 문물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신봉하였던 성리학이 이미 낡은 사상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에게는 청나라와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었고, 서인 세력들에게는 극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결국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 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기록과 달리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 당시 조선의 정계에서 청나라를 배척하는 분위기와 인조의 불안을 염두에 두면 독살설은 가능성이 있으며 인조가 후궁 조씨와 김자점에게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은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주검은 까맣게 변해있었고 7군데 혈(穴)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사약을 마시고 사망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한 세자가 사망하면 치료를 맡은 어의가 문책을 받게 되는데 인조는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고 전해진다.
소현세자 묘지문의 첫 행에는 표제인 ‘조선국소현세자묘지(朝鮮國昭顯世子墓誌)’를 지문의 내용과 같은 크기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마지막 행에는 지문을 쓴 시점인 ‘乙酉(1645) 六月十九日’을 기록하였다. 탁면에는 일부 마멸된 흔적이 있으며, 탁본이 꺾이거나 박락된 부분도 있어 오래 전부터 보존상태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나의 판석(板石)에 지문의 내용을 모두 새겼다.
지문은 당시 대제학이던 이식(李植)이 지었다. 지문의 내용에는 소현세자가 급서하게 됨과 자신이 지문을 쓰게 된 연유를 간략히 서두에서 밝혔다. 소현세자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였으며, 정묘호란 때 분조(分朝)를 맡아 남쪽 지방을 돌아본 일과 병자호란 때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들어간 일, 그리고 환궁하기까지의 행적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소현세자의 효성과 우애, 학식과 교양의 의적함을 말해주는 일화들을 간략히 기술하였다. 특히 이식은 당시 대청관계에 있어서 소현세자가 한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였다. 인조는 소현(昭顯)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이는 ‘덕을 밝혀 노고가 있고, 행실이 중외(中外)에 드러났다.’는 의미임을 적어두었다. 소현세자묘지문의 내용은 이식의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 6권에 「소현세자묘지(昭顯世子墓誌)」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식의 지문은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자신이 듣고 본 것만을 기록한다고 밝혔으며, 기타 춘방(春坊)에서 기록한 글과 서연(書筵)에서의 강론(講論), 심양관소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덕행(德行)의 근본이 되지 않으므로 다 드러내지 못한다고 지문의 끝부분에서 밝혔다. 지문에는 ‘李植謹誌’라 하여 찬자(撰者)의 이름을 기록하였지만, 서자(書者)는 밝히지 않았다. 그라나 『(소현세자)예장도감도청의궤((昭顯世子)禮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918)에는 ‘삼방차비관(三房差備官)’ 명단에 지문서사관(誌文書寫官)이 공조참판 조문수(曹文秀)로 기록되어 있다.
조문수는 창녕조씨(昌寧曹氏)로 좌의정 심수경(沈守慶)의 외손이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처음에는 송설체에 뛰어났으나 외형미에 치우친 점이 싫어 왕희지의 법을 참작하니 체기(體氣)가 농수(濃粹)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소현세자묘지문의 글씨는 왕희지법의 뼈대 위에 송설체의 수려함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1645년 7월 16일 소현세자의 빈궁, 묘소, 장례 세 도감의 관리들에게 포상하였는데, 지석의 글씨를 쓴 지문서사관 조문수에게는 숙마 1필을 내려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인열왕후의 삶을 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금석문의 제작방식과 장황형식까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영조 대에 이르면 왕비나 세자빈의 지석은 2판의 판석에 만든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조 대에는 왕비의 경우 왕과 차이를 두어 한 편으로만 제작하였음을 인열왕후의 지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昭顯世子)墓所都監儀軌』(규장각 13920)
『(昭顯世子)禮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918)
『昭顯世子喪禮謄錄』(장서각 귀2-2965)
『澤堂先生別集』卷6「昭顯世子墓誌」 李植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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