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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자료명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저자 보우(普愚), 이색(李穡), 권주(權鑄),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6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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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태고사)
· 작성시기 1385
· 비고 25367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보우(普愚)
이색(李穡)
권주(權鑄)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탑비(塔碑)
· 크기(cm) 227.3 X 107.6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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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려 말 고승 원증국사를 기린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내용 및 특징]
고려 말의 고승 원증국사 태고보우(圓證國師 太古普愚; 1301(충렬왕 27년)~1382(우왕 8년))의 비석 탁본이다. 원비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5번지 태고사 법당 앞에 위치해 있다. 1977년 8월에 보물 611호로 지정되었다. 이색(李穡)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써서 국사 입적 3년 후인 1385년(우왕 11년)에 세웠다.
비석은 귀부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귀부는 용의머리이며 등에는 길쭉한 육각무늬를 채웠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무늬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형식에 그치고 있어 퇴화한 느낌을 준다. 큼직한 귀부의 뒷면에는 6각의 귀갑무늬가 조각되었고, 용의 머리와 같은 귀두는 위를 향했으며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입도 크게 벌렸으나 옆으로 벌려 이빨만 보인다. 뒷면 윗부분에 비좌를 마련하고 석비를 세웠는데, 아래쪽 끝을 꽂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비신은 직사각형으로 앞면에 본문을 새기고 뒷면에는 음기가 있는데, 앞면 뒷부분의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이라는 제액이 있다. 이수는 밑면에 낮은 1단의 받침이 있고, 그 밖으로 앙련문(仰蓮紋)이 돌려졌으며 위에는 운룡(雲龍)이 새겨졌다.
비문의 내용은 국사가 홍주에서 태어나 회암사로 출가하여 만법귀일 조주무자 등의 화두를 참구하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중흥사에 주석하며 태고암가를 짓고 원에 유학하여 임제의 18대손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었으며 소설산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다 공민왕이 참석한 봉은사 법회를 주관하고 왕사에 책봉되어 원융부를 중심으로 구산 통합 운동을 하였으며 신돈에 의해 속리산에 금고당하기도 하였으나 신돈 실각 후 국사에 책봉되었고 영원사에 주석하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피전자 보우는 고려 말의 승려로 경기 양평 출신이다. 처음 법명은 보허(普虛), 뒤에 보우로 바꾸었다. 법호는 태고(太古)이다. 13세에 양주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후 장흥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하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1337년에 개성의 전단원(栴檀園)에서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다가 이듬해 크게 깨달았다. 소요산 백운암(白雲庵), 삼각산 태고암(太古庵) 등에 머무르다가 1346년에 원(元)에 가서 연경(燕京) 대관사(大觀寺)에 머물다가 이듬해 절강성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에 가서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을 만나 인가(印可)를 받고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1348년에 귀국하여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머물다가 경기 용문산 북쪽 기슭에 소설암(小雪庵)을 짓고 머물렀다. 56년에 왕사(王師)가 되어 개성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다가 소설암으로 돌아갔다. 그 후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와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에 머물고, 1371년에 공민왕이 국사(國師)에 봉하였으나 사양하고, 1381년에 우왕이 다시 국사에 봉했다. 그는 간화선(看話禪)의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고, 선교(禪敎)의 통합과 교단의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어록으로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이 있다.
비문의 찬자 이색은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이다.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비문의 서자 권주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천할 때, 전법총랑(典法摠郎)으로서 왕을 호종한 공으로 1363년 신축호종이등공신(辛丑扈從二等功臣)에 서훈되었다. 1374년에는 홍륜(洪倫)·최만생(崔萬生)과 더불어 조카 권진(權瑨)이 공민왕을 살해하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86년(우왕 12)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있을 때에 집을 수리하여 왕의 총비 숙녕옹주(肅寧翁主)의 궁으로 제공하여 시좌소(時座所: 그 당시 왕이 거처하는 궁전)로 삼으니 백관들의 정사가 이곳에서 품계되었다. 1389년(창왕 1)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과거시험을 관장하였고 이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유필로는 본 자료 외에도 여주 신륵사의 「신륵사장각기(神勒寺藏閣記)」, 「안심사 지공나옹사리석종비(安心寺 指空懶翁舍利石鐘碑)」 등이 있다. 『서청(書鯖)』에서는 그의 글씨에 대해 우영흥(虞永興; 우세남)과 같다고 하였다.
[자료적 가치]
원증국사의 기념물은 태고사와 가은 양산사, 양평 사나사에 석종이 그리고 미원 미지산 소설암에 석탑이 세워졌다. 문헌기록과 함께 보우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참고문헌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 / 李智冠 / 伽山文庫, 1997. 『韓國金石全文』中世下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朝鮮金石總覽』上 / 朝鮮總督府 編 / 亞細亞文化社, 1976. 『海東金石苑』上 / 劉燕庭 / 亞細亞文化社, 1976. 『중국역대불교인명사전』 / / 이회문화사 / 2011. 『시공 불교사전』 / / 시공사, 200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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