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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자공나옹사리석종비(安心寺指空懶翁舍利石鐘碑)

자료명 안심사자공나옹사리석종비(安心寺指空懶翁舍利石鐘碑) 저자 미상, 이색(李穡), 권주(權鑄),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6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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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평안북도 영변 (현재주소: 평안북도 영변군 안심사)
· 작성시기 1384
· 비고 25366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이색(李穡)
권주(權鑄)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리탑비(舍利塔碑)
· 크기(cm) 115.1 X 60.6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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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려말 나옹화상과 지공존자를 기린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안심사자공나옹사리석종비(安心寺指空懶翁舍利石鐘碑)
[내용 및 특징]
고려 말기의 고승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충숙왕 7년)~1376(우왕 2년)]과 그의 스승 지공존자 선현(指空尊者 禪賢 : 提納薄陀, 1300~1361)을 기리는 비이다. 이색(李穡)이 짓고 권주(權鑄)가 써서 1384년(우왕 10년)에 세웠다. 장려(張侶)가 두 승려의 사리를 안심사에 봉안하자, 나옹의 제자로 신륵사 입적 시에 모셨던 각지(覺持)가 이에 대한 비를 세우고자 청원하여 왕명으로 비문을 짓게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이런 비 건립 연유를 상세히 기술하고 두 승려의 생애는 간략히 서술하였다. 1384년(우왕 10)에 세웠고, 현재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하행동 안심사에 보존되어 있다. 다른 비와 비교하여 비문에 계선을 그은 점이 특징적이며 음기에는 나옹화상 문생의 명목이 기록되어 있다. 장서각본은 비음기의 미상인 글자를 확인할 수 있는 선본이다.
안심사는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에 있는 사찰로 31본산시대에는 보선사의 산내말사였으나 창건 및 역사에 관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인도 승려 지공의 사리가 봉안된 곳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이다. 지공이 입적하자 그의 몸에서는 많은 사리가 나왔는데, 그 중 9개와 나옹의 두골 한 조각과 사리 5개를 함께 모셔 석종 속에 간직하였다. 이로 보아 이 사찰은 고려 말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안심사라는 명칭은 중국의 소림사에서 중국 선종의 개조인 달마대사가 2조 혜가대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주었다는 고사에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이 절의 사격과 그 배경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이로 미루어 이 절은 설종의 사찰로 추정된다.
석종은 부도의 다른 이름으로 고승이나 대덕 스님의 유골 또는 사리를 보관한 탑이다. 석종형 부도는 고려 중엽부터 발달하였다. 방형의 기단석 위에 독이나 종 모양의 돌을 다듬어 세우고 꼭대기에 보주를 새긴 것을 말한다. 여주 신륵사 보제사리석종은 1379(우왕 5) 지공과 나옹을 위해 세웠으며, 안심사의 석종과 함께 표준형이라 할 수 있다.
피전자 지공은 원나라 때의 고승(高僧)이다. 인도 마갈타국(摩羯陀國) 사람으로, 8살 때 승려가 되었다. 이름은 제납박타(提納薄陀, 禪賢)이다. 원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전했는데, 이때 고려(高麗)의 나옹화상(懶翁和尙)에게 인가(印可)를 주었다. 충숙왕 15년(1328) 고려에 들어와서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예배하고 연복정(延福亭)에서 계를 설했다. 다시 원나라로 가 연경(燕京)에서 법원사(法源寺)를 짓고 머물렀는데 이때 고려의 혜근(慧勤)에게 선종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의 부도가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와 개성시 화장사(華藏寺)에 남아 있다.
피전자 나옹은 송나라 때 임제종(臨濟宗) 승려이다. 서주(舒州, 安徽)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왕(汪)씨고, 자는 불감(佛鑑)이다. 어릴 때부터 광교원심(廣敎圓深)을 사사했다. 나중에 오조법연(五祖法演)을 참알(參謁)하고 그 법사(法嗣)가 되었다. 일찍이 서주태수(舒州太守) 손정신(孫鼎臣)의 요청에 따라 태평산(太平山) 흥국선원(興國禪院) 주지를 지냈는데, 법도(法道)를 크게 전파했다. 휘종(徽宗) 정화(政和) 초년에 응조(應詔)하여 변경(汴京) 지해사(智海寺)에 있었는데, 5년 뒤 돌아가기를 청해 건강(建康) 장산(蔣山)에 머물렀다. 추밀(樞密) 등자상(鄧子常)이 상주(上奏)하여 자의(紫衣)와 불감선사(佛鑑禪師)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7년 입적했고 세수(世壽) 59세다. 불과극근(佛果克勤), 불안청원(佛眼淸遠)과 함께 임제오조법연(臨濟五祖法演) 문하의 삼불(三佛)로 인정받았다.
비문의 찬자 이색은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이다.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비문의 서자 권주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천할 때, 전법총랑(典法摠郎)으로서 왕을 호종한 공으로 1363년 신축호종이등공신(辛丑扈從二等功臣)에 서훈되었다. 1374년에는 홍륜(洪倫)·최만생(崔萬生)과 더불어 조카 권진(權瑨)이 공민왕을 살해하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86년(우왕 12)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있을 때에 집을 수리하여 왕의 총비 숙녕옹주(肅寧翁主)의 궁으로 제공하여 시좌소(時座所: 그 당시 왕이 거처하는 궁전)로 삼으니 백관들의 정사가 이곳에서 품계되었다. 1389년(창왕 1)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과거시험을 관장하였고 이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유필로는 본 자료 외에도 여주 신륵사의 「신륵사장각기(神勒寺藏閣記)」, 고양시 태고사(太古寺)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등이 있다.
[자료적 가치]
국내에 전하는 나옹의 비는 이 금석문을 포함하여 7개나 되며 기념물은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사불산, 용문산, 구룡산, 묘향산, 회암사, 신륵사, 정양사, 오대산, 위봉사, 광법사 등에 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금석문과 함께 고려 후기 고승을 기리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 / 李智冠 / 伽山文庫, 1997. 『韓國金石全文』中世下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朝鮮金石總覽』上 / 朝鮮總督府 編 / 亞細亞文化社, 1976. 『海東金石苑』上 / 劉燕庭 / 亞細亞文化社, 1976. 『중국역대불교인명사전』 / / 이회문화사 / 2011.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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