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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자료명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저자 김부일(고려)(金富佾(高麗)) 찬(撰), 이원부(고려)(李元符(高麗)) 서(書)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6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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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상남도 협천 (현재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 작성시기 1125
· 비고 25361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낙진(樂眞)
김부일(金富佾)
이원부(李元符)
이원부(李元符)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탑비(塔碑)
· 크기(cm) 230.3 X 109.1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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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려의 왕사 원경왕사(元景王師)의 행적을 기린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 원경왕사의 탑비 탁본이다. 본래 경남 합천군 가야면 반야사 터에 있었으나 1968년 현재의 해인사로 옮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였다. 비의 높이는 2.3㎝, 너비는 1.2㎝, 재료는 화강석이다. 비문은 자경 1.8㎝의 해서이며,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이 비문을 지었고, 이원부가 글씨를 썼다. 비는 귀부, 비신, 개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평박한 특색이 있다. 장서각 소장 탁본에는 음기 없이 전면만 있다. 원경왕사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128호로 지정되었다.
장서각에는 없지만 왕사비의 음기는 전면과 마찬가지로 같은 인물인 이원부가 썼는데, 갈성말치(葛城末治)의 『조선금석고』에서 “신라, 고려 양조에 있어서 금석의 서체는 대부분 구법으로 일관한 경향이 있는데, 홀로 원부의 우법(虞法)이 있음은 실로 새벽하늘의 샛별에 비할 수 있는 진귀하고 중한 것이다.”라고 하였던 당시 비문이 대부분 구양순체인데 반해 우세남체라는 희귀점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또한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親承敎訓者)로 수좌 1인과 삼중대사 2인 및 44인의 중대사, 가풍을 선양한 자(揚法化者)로 삼중대사와 중대사 수십인, 시봉하며 받든 자(奉待甁巾者)로 중대사 수십인, 운영을 도운 자(補翼事務者)로 중대사 수십 인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직명에 따라 문도를 구분하였음을 밝혔다.
피전자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申), 이름은 요진(樂眞)이고, 시호는 원경(元景)이다. 경덕국사와 대각국사에게 사사하였으며, 고려 숙종 때 승통이 되었고, 예종 때 왕사로 책봉된 다음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그는 고려의 전성기를 산 화엄종 출신의 고승이었다. 그가 왕사로 책봉된 사실은 불교사에 대해 간략히 취급한 『고려사』에도 밝혀져 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 대강을 알기 위해서는 현재 해인사 경내에 있는 그의 비문이 가장 상세하다. 그의 비문은 중요한 금석문을 수록한 여러 문헌에 실려 있으나 부분적으로 파손된 후에 비문이 판독되었으므로 파손되기 전에 이루어진 좀더 충실한 탁본에 의하여 보충될 필요성이 있다.
원경왕사의 생몰년대에 대해서는 1050~1119년과 1045~1114년으로 정리된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그의 생몰연대를 알 수 있는 비문의 내용은 ‘병신년(1056)에 모사(某寺)의 관단(官壇)에 나아가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사실이 있으므로 그의 ‘법하(法夏) 62세’를 고려하면 1117년에 입적하였음이 확실하다. 원경왕사는 의천(義天)보다 7세 연상인 셈이지만, 그보다 오히려 16년을 더 생존했다. 원경왕사는 의천을 수행하여 송나라에 다녀왔고, 의천이 많은 사업을 벌여놓고 세상을 떠나자 그가 남긴 일을 완성하였다. 의천은 1090년에 『제종교장총록』을 간행한 후 다시 경, 율, 론을 모아 대장경을 간행하도록 국가의 뒷받침을 요구하였고, 요진은 다른 의학명승과 더불어 이를 완성시켰다. 의천은 1101년에 입적하였고 대장경의 간행에 대해서는 요진의 비명에만 정리되어 있으므로 미루어 이 간행사업은 요진이 마무리했다고 할 정도로 그의 노력은 절대적이었다. 『제종교장총록』은 목록만 현존하고 1090년 이후에 착수한 경, 율 론은 단편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이보다 앞서 1092년부터 1099년까지의 시기에 간행된 장소는 단편이 현존하고 있으나 의천의 사후에 완성되었을 경, 율 론은 단편마저 나타나지 않는 점은 매우 아쉽다고 하겠다.
원경왕사와 의천은 모두 경덕국사 난원의 문인이므로 법형제이지만 의천에 대한 비문의 하나의 영통사 대국국사비문에는 그보다 오히려 연상인 원경왕사가 문도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원경왕사비문에는 그가 의천을 만났을 때 의천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원경왕사도 지기를 만났다고 기뻐했다는 점으로 보아 사제의 상면이라기보다 법형제라 하겠다. 이는 대각국사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비문을 지을 때까지 영향을 준 때문이라 하겠다.
비문의 찬자 김부일은 김부식의 형으로 어려서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이 되었다가 추밀원사 왕가를 따라 송나라에 가서 명문으로 송나라 철종의 찬사를 받았다. 숙종 때 습유와 지제고를 거쳐 원주와 상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여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예종 때 예부낭중이 되었는데, 요나라가 여진을 치려고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모든 대신이 찬성했으나, 김부식과 함께 윤관의 여진정벌 직후이므로 출병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그 후 보문각대제를 거쳐 직학사에 올라 왕과 보문각 유신들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동지사정당문학한림원학사승지가 되었다. 1127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로 승진하였으며, 뒤에 수태위개부의동삼사비서성사주국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관후하고 문장에 능하였다고 한다.
비문의 전액과 본문의 글씨를 쓴 이원부(李元符)는 고려 인종 때의 서예가이다. 가문이나 성장과정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대부분의 서예가들이 구양순(歐陽詢)의 서체를 따르던 그 시대의 시류에 구애받지 않고 우세남(虞世南)의 서체를 따른 특이한 존재로서 해서(楷書)에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 손꼽혔다는 사실만이 전해진다. 길고 가는 붓의 필획과 여유있는 결구로 전체의 조형을 유지한 필법(筆法)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원경왕사의 생애와 활동양상을 비롯하여 당시 불교계의 추이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음기를 통해 직명에 따라 문도를 나누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당시 구양순체가 성행하던 시기에 우세남체를 잘 썼던 이원부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경왕사비를 찾아 떠나는 여행」 / 허추영 / 『서예문화』57, 2002.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 / 李智冠 / , 伽山文庫, 1996. 『韓國金石文大系』4 / 趙東元 / ,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韓國金石全文』中世上 / 許興植 / , 亞細亞文化社, 1984. 「高麗中期 華嚴宗派의 繼承-元景王師를 중심으로-」 / 許興植 / 『韓國史硏究』 35, 1981. 『海東金石苑』上 / 劉燕庭 / , 亞細亞文化社, 1976. 『大東金石書』 / 李俁 / 亞細亞文化社, 1976, 『朝鮮金石攷』 / 葛城末治 / 1935, 『朝鮮金石總覽』上 / 朝鮮總督府/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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