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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자료명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저자 해린(海麟), 정유산(鄭惟産), 안민후(安民厚),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GO019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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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강원도 원성 (현재주소: 강원도 원주시 법천사지)
· 작성시기 1085
· 비고 GO019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해린(海麟)
정유산(鄭惟産)
안민후(安民厚)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탑비(塔碑)
· 크기(cm) 296.9 X 142.4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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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려 전기의 고승 지광국사의 탑비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내용 및 특징]
고려 전기의 법상종 고승 지광국사 해린(智光國師 海鱗 : 성종 3, 984~ 문종 24, 1070)의 탑비 탁본이다. 원비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 터에 있었다.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해서로 써서 이영보(李英輔)와 장자춘(張子春)이 새겨 국사의 입적 후 15년이 지난 1085년(선종 2)에 세웠다.
귀부와 구름무늬의 이수에 테두리를 당초문으로 잘 엮은 비신이 어울려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이는 비이며, 휘장을 둘러친 독특한 모양으로 현지를 떠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지광국사가 태어나 출가하여 왕륜사 대선장에서 승과에 급제하고 궁궐에서 법화경을 강설하였으며 문벌 이자연의 아들인 소현(韶顯)이 제자가 되고 문종이 현화사에 주석하게 하며 왕사와 국사로 연이어 책봉을 받고 입적하여 비를 세우게 된 과정을 기술하였다. 이 내용 중에서 왕사로 책봉할 때의 과정과 승계가 올라갈 때마다 가사를 하사받고 법호를 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음기에는 국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와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선후사이몰세자(先後師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 대덕으로 나누어 언급된 인명이 1400인에 이른다.
해린(海麟, 984년~1067년)은 고려 중기의 승려이다.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이며 법상종의 고승이다. 본관과 성은 원주 원씨, 자는 거룡(巨龍)이다. 현화사를 중심으로 법상종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당시의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이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을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의 다섯째 아들인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059년 내전(內殿)에서 개최된 백고좌(百高座)의 제일 설주(說主)가 되었으며, 1067년 은퇴하여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 머무르다가, 1070년 10월에 입적하였다. 탑비의 음기에 해린의 제자를 열거하였는데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선후사이몰세자(先後師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 대덕으로 나누어 기록했는데, 거기 실린 인명이 1400명에 이른다.
원비는 나라를 대표했던 고승의 업적을 담은 비석인 만큼 석공들의 지극한 정성이 곳곳에 배어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신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어 용맹무쌍한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긴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져 여의주를 희롱하는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린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현묘탑비와 관련하여 법천사에는 지광국사탑(智光國師塔)이 있었다. 지광국사탑은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에 있었으나 한일병탄 직후 오사카로 밀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에 있다가 현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탑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자료적 가치]
고려 전기의 선승 지광국사 해린의 생애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고려의 승려 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 / 李智冠 / 伽山文庫, 1995.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에 關한 硏究」 / 李榮姬 / 『考古美術』173, 1987. 『韓國金石全文』中世上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海東金石苑』上 / 劉燕庭 / 亞細亞文化社, 1976. 『大東金石書』 / 李俁 / 亞細亞文化社, 1976. 『朝鮮金石攷』 / 葛城末治 / 1935. 『朝鮮金石總覽』上 / 朝鮮總督府 /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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