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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자료명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저자 미상, 위징(魏徵), 구양순(歐陽詢),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구성궁례천명(九成宮醴泉銘) , 九成宮醴泉銘 저자(이칭) 魏徵(唐) 奉勅撰; , 위징(당)봉칙찬;e구양순(당)서(魏徵(唐)奉勅撰;e歐陽詢(唐)書) , 위징(당)(魏徵(唐)) 봉칙찬(奉勅撰), 구양순(당)(歐陽詢(唐)) 서(書)
청구기호 K3-469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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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중국 섬서성 (현재주소: 중국 섬서성 인유현 구성궁 고지)
· 작성시기 632
· 비고 3469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위징(魏徵)
구양순(歐陽詢)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비명(碑銘)
· 크기(cm) 28.6 X 18.7
· 판본 첩장본(帖裝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40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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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당나라의 명비석 구성궁예천명의 탁본을 첩장으로 장황한 금석첩.
원자료제목
· 표제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내용 및 특징]
당 태종이 구성궁(九成宮)에서 예천(醴泉)을 발견하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구성궁은 당나라의 여름 별궁으로 그 토대는 수 문제가 조영한 인수궁(仁壽宮)에서 비롯된다. 태종이 이를 수복하여 구성궁으로 개명한 뒤 고종 때까지 사용하였다. 632년 4월 16일 태종이 왕비와 함께 성 서쪽을 산보하던 중 고각(高閣) 아래 서성이다가 땅이 촉촉한 것을 보고 지팡이로 파자 샘이 용출했는데, 그 맑기가 거울 같고 맛이 감미로워 단술과 같았다고 한다. 당시 구성궁은 깊은 산중에 위치했으나 지대가 높아 물이 부족했는데, 이 샘이 출현하자 태종은 당나라의 덕에 응하는 상서로운 일로 여기어 기념비를 세우게 했다.
인수궁은 본래 수나라 문제가 지은 피서용 이궁이다. 수나라가 무너지자 궁전도 폐허가 되었는데, 631년 당나라 태종이 이를 수리하고 규모도 더 확장하여 구성궁이라 불렀다. 궁전의 둘레는 약 3㎞이며, 안에는 금원(禁苑)과 무기고, 사찰과 정자와 누각 등이 지어졌다. 규모가 크고 풍경도 아름다워 수나라와 당나라에 걸쳐 으뜸가는 행궁으로 꼽혔으나 왕조의 멸망과 함께 쇠락해갔고,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전각들도 붕괴하여 폐허가 된 채 잊혀져갔다. 그러나 명문과 명필로 새겨진 비석으로 인하여 그 명맥이 이어졌다. 린유현의 천태사(天台寺) 서북쪽 산비탈에는 널리 알려진 2개의 옛 비석, 곧 당나라 초기의 중신인 위징(魏徵)의 글을 구양순(歐陽詢)의 서체로 새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과 당나라 고종이 쓴 〈만년궁명병서(萬年宮銘幷序)〉가 남아 있다. 비문은 궁전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궁전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땅 속에 묻혀 있던 궁전은 더 이상 지난날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에서 약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중국이 성립한 뒤 산시성의 성급(省級) 문물보호단위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원비는 현재 궁터의 비실에 전하는데, 이수(螭首) 중앙에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란 전액이 두 줄로 양각되었고, 비신에 24행 1,109자(1행 49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검교시정(檢校侍中) 위장(魏徵, 580-643)이 화려한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로 지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 구양순(歐陽詢, 557-641)이 썼다.
글씨를 쓴 구양순은 당나라의 명필로, 자는 신본(信本)이다. 담주임상(潭州臨湘: 후난성) 출생이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 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는데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황보탄비(皇甫誕碑)》《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화도사비(化度寺碑)》 등의 비와 《사사첩(史事帖)》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성을 담고 있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않은 능서가(能書家)로서 유명하다.
장서각 본은 건곤(乾坤) 2첩에 장황된 것인데 전액은 실리지 않았다. 고탁(古拓)과 비교하면 자형이나 비면의 탈락이 다르고 점획도 좀 섬약하다. 이로 보아 장서각 본은 원래의 비면을 떠내어 찍어낸 석인본으로 여겨진다. 각 첩 첫머리에 [이왕가도서지장(李王家圖書之章)]이 찍혀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왕실에서 중국 명 법첩을 소장한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增補校碑隨筆』/ 淸 方若ㆍ王壯弘 增補 / 上海書畵出版社, 1981. 『九成宮醴泉銘』 中國法書選 31 / / 東京:二玄社, 198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Ⅱ-帖裝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5.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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