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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 진흥왕순수비(磨雲嶺 眞興王巡狩碑)

자료명 마운령 진흥왕순수비(磨雲嶺 眞興王巡狩碑) 저자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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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남도 이원 (현재주소: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 작성시기 568
· 비고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147.0 X 44.0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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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함흥역사박물관에 소재한 신라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의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마운령 진흥왕순수비(磨雲嶺 眞興王巡狩碑)
[내용 및 특징]
568년(신라 진흥왕 28)에 제작된 진흥왕 순수비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이 민정을 시찰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남긴 유적인 순수비는 우리나라에서는 진흥왕대의 것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로는 마운령비 외에 경남 창녕 순수비, 서울 북한산 순수비, 함경남도 황초령 순수비가 있다.
마운령비는 본래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사동 운시산(雲施山) 마운령에 있던 것을 함흥본궁에 옮겨와 황초령비와 함께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1929년 9월 전적(典籍) 조사차 현지에 나가 있던 최남선(崔南善)이 현지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 본격적으로 조사하여 소개하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비신은 높이 1.36m, 너비 0.45m, 두께 0.3m의 화강암으로, 앞면에는 1줄에 26자씩 10행, 뒷면에는 1줄에 25자씩 8행의 해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방형의 지대석과 갓돌은 후에 제작하여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마모가 심하지 않아 대부분 판독이 가능하다. 비문에는 진흥왕이 568년 8월 21일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국경지대를 순시하여 민심을 살핀 사실과 비를 세우게 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고, 수행한 사람들의 이름과 관직이 뒷면에 새겨져 있다. 현전하는 4기의 진흥왕순수비 중 비문의 글자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 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선조 대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인데, ‘고원은 정천군인데 함흥 황초령 및 단천에 또한 순수비가 있으니 동옥저 또한 당시에 신라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신경준의『증보문헌비고』「여지고」에서 ‘端川碑文今未及考(단천비문 기록은 지금으로는 고증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김정희도 ‘端川之有巡狩碑 亦無明據’라 하여 고증을 제시하지 못해 마운령의 순수비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정희는 「진흥이비고」에서 ‘동국지지에 이르기를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안변부를 비렬주로 삼고 고원을 정천군으로 삼았으며 함흥의 황초령 및 단천에도 순수비가 있고 보면 옥저도 때론 신라에서 빼앗은 바가 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상고해 보건대 정천군은 지금의 덕원이요 고원이 아니니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또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지역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비가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학계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최남선이다. 1929년 그는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만덕산 산중에 묻혀있던 것을 강필동(1793∼1857)의 문집 중에 있는『이성고기 (利城古記)』를 근거로 해서 찾아냈다. 1929년에 함경남도에서 문헌탐방여행을 하던 중 이원군 동면에 있는 정조 때의 사람 강필동의 유택에 많은 사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씨 후손이 갖고 있는 장서 중에는 『이성고기』라 제한 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외제에 ‘율계낭인징집(栗溪浪人徵集)’의 권제에 ‘북역건치연혁고(北域建置沿革考)’라는 표제의 1권에 ‘… 於是謂此地爲新羅舊疆 乃建眞興王之巡狩定界碑 以脅女眞 (卽立石雲施城)’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이를 발견한 최남선은 답사를 하여, ‘남이장군비(南怡將軍碑)’라고 하는 고비가 바로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확인하고 이를 널리 소개하였다.
비문에는 진흥왕의 업적과, 순수의 목적, 그리고 입비의 연유 등이 적혀 있고 또한 지명, 인명, 관등명 및 ‘짐(朕)’·‘건호(建號)’·‘건도(乾道)’등이 적혀있어 신라 중고기의 정치사, 제도사 및 사상사 이해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서 비문이 제일 많이 남아 있어 당시의 역사와 서예, 이두문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신라의 국경 ·관직 ·제도 ·지명 등을 밝혀주는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금석문 자료이며, 당시 서체와 이두문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대로부터의 통신』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 푸른역사, 2004.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 權悳永 / 학연문화사, 2002.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 盧鏞弼 / 一潮閣, 1996.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 Ⅱ / 國史編纂委員會 / 國史編纂委員會, 1995. 「磨雲嶺碑의 ‘客’연구」 / 盧鏞弼 / 『國史館論叢』 48, 국사편찬위원회, 1993. 「磨雲嶺 眞興王巡狩碑의 近侍隨駕人에 관한 檢討」 / 李道學 / 『新羅文化』 9,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韓國金石全文』 古代篇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新羅中古 金石文의 人名表記(Ⅰ)」 / 金昌鎬 / 『大丘史學』 22, 대구사학회, 1993. 「新羅 眞興王代의 臣僚組織에 대한 一考察」 / 李文基 / 『大丘史學』 20·21, 대구사학회, 198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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