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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지석(武寧王誌石)

자료명 무령왕지석(武寧王誌石) 저자 사마(斯麻),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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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현재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 작성시기 523
· 비고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사마(斯麻)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35.2 X 41.5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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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백제 무령왕릉지석 중 왕의 지석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무령왕지석(武寧王誌石)
[내용 및 특징]
국보 제 163호인 무녕왕릉지석 가운데 왕의 지석 탁본이다. 본래의 지석은 2매로 왕과 왕비의 것이다. 왕과 왕비의 장례 때 지신(地神)에게 묘소로 쓸 땅을 매입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 넣은 매지권(買地券)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지석은 본래 무덤방(墓室)에 직접 묵서(墨書) 혹은 주서(朱書)하거나 무덤방 벽면에 새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돌 위에 새기거나, 틀을 이용하여 벽돌, 혹은 주철을 소재로 작성된 것에서 청자나 백자에 쓰여진 것 등 시대와 피장자의 신분, 장법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원래 묘지는 중국에서 동한(東漢) 시기에 기원하여 위진시대 이후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국에도 유입된 것이다.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서 출토된 한(漢) 연평원년(延平元年, A.D. 106) 고무중(賈武仲)의 처 마강(馬姜)의 묘지는 기재 내용이 묘지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완성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데 강소성(江蘇省) 비현(丕縣)에서 발견된 무우(繆宇)의 묘에는 뒷방(後室) 입구 상단에 피장자의 성명, 사망, 장례일자, 관직, 송사(頌辭) 등의 내용이 새겨 있다.
한국에서 묘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에서 주로 보이는 명문이 새겨진 방형의 소석판(小石版)이나 도판(陶版) 등의 형태이다. 그러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묘지라고 하면 무덤의 벽면에 쓰여지거나 새겨진 명문을 포함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에는 무덤방 벽면에 묵서로 묘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현재 3기의 고분이 그러한데 모두루총(牟頭婁塚), 동수묘(冬壽墓)로 알려진 안악(安岳) 3호분, 그리고 덕흥리(德興里) 고분이 그것이다.
협의의 개념에서 소판의 형식을 빌린 묘지로서 가장 오래된 본 자료인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나온 지석이다. 벽돌무덤인 무녕왕릉의 널방[玄室] 입구에서 왼쪽에는 왕비의 지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왕의 것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양나라 때 오수전이 한 꾸러미 놓여 있었다. 사실 무녕왕릉의 묘지석은 묘지라고 부르기보다는 중국의 장례 풍속을 따라 지신으로부터 땅을 사들인다는 뜻으로 만든 매지권(買地權)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2매의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무녕왕릉 지석은 앞면에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해(523년)에 죽어 묘에 안장하며 매지문서(買地文書)를 작성한다는 내용을 6행에 걸쳐 음각하였으며,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치고 간지(干支)와 8괘(八卦)를 배합한 방위를 새겼다.
또 하나의 지석에는 526년 왕비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529년 왕과 합장한다는 내용을 적고, 뒷면에는 일만문(一萬文)의 돈으로 토지를 매입하여 무덤을 만든다는 내용을 적었다. 문장은 매우 간결한 한문체이며, 서풍(書風)은 중국 남조풍(南朝風)의 우아한 필치를 보여준다.
무령왕릉지석 글씨가 고신라비보다 미감이 뛰어난 이유는 백제가 신라보다 빨리 중국문물을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기존과 달리 돌이 아닌 벽돌로 만들어진 무령왕릉 자체가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조공과 책봉관계다. 이것이 말해주듯 무령왕릉지석 글씨는 이미 4세기 왕법(王法)으로 글씨의 전형을 구가한 동진(317~419)의 서풍(書風)을 받은 남조의 양나라 글씨풍이 백제에 전해진 뒤 그것이 백제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것은 양나라 고조와는 책봉과 조공관계인 무령왕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석에서 천자(天子)나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하는 가장 격이 높은 ‘崩(붕)’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견된다. 백제왕의 주체성만큼이나 글씨 또한 백제화된 것이다.
[자료적 가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사료로써 백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百濟의誌石〉/ 黃壽永 / 「한국일보」1971년 7월 14일。 〈百濟王陵發掘의 歷史的意義〉 / 李丙燾 / 月刊「世界」1971년 8월호。 〈百濟武寧王妃墓碑陰の冥券〉/ 瀧川政次郞 / 《古代文化》24-3, 1972。 〈百濟武寧王妃墓碑と陰冥券考追考〉/ 瀧川政次郞 / 《古代文化》24-17, 1972。 〈百濟武寧王陵出土誌石에 대하여〉 / 李丙燾, / 《學術院論文集》11, 1972。 《武寧王陵發拙調査報告書》 / 文化財管理局 / 三和出版社, 1974。 〈百濟武寧王陵出土誌石에 대하여〉 / 李丙燾 / 《韓國古代史硏究》, 1976。 〈百濟武寜王妃墓誌陰冥券考〉 / 瀧川政次郞 / 《法政史硏究》3, 1976。 〈百濟武寧王妃墓誌陰冥券考〉 / 瀧川政次郞 / 《法史學硏究》3, 1976。 《韓國金石遺文》 / 黃壽永 / 一志社, 1976。 《韓國金石文大系》2 / 趙東元 / 圓光大學校出版局, 1981。 《韓國金石全文》古代篇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韓國書藝史綱〉 / 崔完秀 / 《澗松文華》33, 1987。 〈金石文篇〉 / 鄭求福 등 /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百濟武寧王陵》 / / 忠淸南道·公州大學校 百濟文化硏究所, 1991。 〈武寧王妃誌石〉 / 金英心, / 《譯註韓國古代金石文》권1,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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