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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자료명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저자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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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북도 단양 (현재주소: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
· 비고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비문(碑文)
· 크기(cm) 93.0 X 107.0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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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충북 단양에 소재한 신라 적성비(赤城碑)의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내용 및 특징]
단양군 단성면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 적성비의 탁본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각 행의 명문은 20자씩으로 짐작되어 19행까지는 20자씩 모두 380자이고, 20행과 21행은 19자씩으로 38자이며, 끝 행은 12자로 전체의 명문은 도합 430자로 추산된다. 지금 남아 있는 글자는 284자로서 판독이 가능하다. 원석은 자연석 형태이며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서예적 측면에서는 진흥왕대인 6세기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는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서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들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에 언급된 사람들의 이름과 관등을 『삼국사기』의 내용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진흥왕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을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문장 첫머리에는 왕교(王敎)를 받은 10인의 중앙고관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이간(伊干) 이하 급간(及干) 이상의 고관이고, 모두 탁부와 사탁부의 출신부(部)를 가진 점으로 보아 왕경인임을 알 수 있다. 인명 밑에 ‘지(智)’의 경칭이 있는 것은 진흥왕 순수비와 같으나, 관등 밑에도 ‘지(支)’의 경칭이 붙은 것은 다르다. 출신부명의 유무는, 없는 경우는 앞사람의 부명과 같기 때문에 생략된 것이며, 이는 황초령비나 마운령비에서도 볼 수 있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한편 적성지방의 관습적인 전사법(佃舍法)을 법으로 삼아 공인한 점을 통해 법이 이룩되는 새로운 사례를 알 수 있다. 또한 야이차 등의 공훈자에 대한 특수한 포상조처를 일반화하여 전국에 통용되는 국법으로 발전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세력을 축출하고 첫발을 디딘 요충지에 비를 세웠다는 점에서도 적성비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순수비(巡狩碑: 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자료적 가치]
진흥왕대 초기 중앙정치조직이나 지방통치조직, 국법과 전사법과 같은 율령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예서와 해서가 이양하는 시기 신라 서체를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權悳永 / 학연문화사, 2002. 「新羅 '赤城碑'의 書體 硏究」/ 孫煥一 /『泰東古典硏究』16, 翰林大學校 泰東古典硏究所, 1999. 「'節' ·'等'의 의미분석과 赤城碑 '敎事'부분의 재검토」 / 이종서 /『韓國史論』39, 서울대 국사학과, 1998. 「6세기 新羅의 村落支配 强化 過程」 / 朱甫暾 / 『慶北史學』19, 1996.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Ⅱ / / 國史編纂委員會, 1995. 「新羅 中古 金石文 硏究」/ 趙東元 / 『國史館論叢』42, 국사편찬위원회, 1993. 「丹陽 新羅 赤城碑 建立의 背景--也爾次의 功績과 恩典의 性格을 중심으로--」 / 李宇泰 /『泰東古典硏究』8,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丹陽赤城碑의 재검토」/ 金昌鎬 /『嶺南考古學』6, 영남고고학회 , 1989. 「丹陽 赤城碑文의 구성」/ 金昌鎬 /『伽倻通信』11·12합집 , 1985.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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