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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

자료명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 저자 이왕직실록편찬실(李王職實錄編纂室) 편(編), 왕석수(王錫綬)
자료명(이칭) 開城赴援錄(高宗 3年丙寅, 1866) , 개성부원록(고종 3년병인, 1866)(開城赴援錄(高宗 3年丙寅, 1866)) 저자(이칭) 李王職實錄編纂會 編 , 이왕직실록편찬회 편(李王職實錄編纂會 編)
청구기호 K2-160 MF번호 MF35-702, 1065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雜史類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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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사년미상(寫年未詳)
· 청구기호 K2-160
· 마이크로필름 MF35-702, 1065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왕석수(王錫綬) 저(著)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이왕직실록편찬실(李王職實錄編纂室)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27.0 X 19.6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2권(卷)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2.4×15.8cm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李王職實錄編纂室 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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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867년(고종 4) 王錫綬1866년(고종 3) 丙寅洋擾 때 개성에서 강화로 지원군을 파견한 전말을 기록한 것을 이왕직 실록편찬실에서 필사한 것이다.
서지사항
‘李王職實錄編纂用紙’가 인쇄된 회색 단면 원고지에 필사하였다. 서명은 表紙書名에 근거하였다. 청색 龜甲紋 표지에 黃絲로 粧䌙되어 있으며 목판 四周가 인쇄된 종이 題籤에 표지 서명을 필사하였다. 앞표지 우측 상단에 ‘高宗三年丙寅’이라는 기록이 있다. 卷末의 ‘上之 四年丁卯(1867) 三月 日, 前縣監王錫綏謹記’라는 筆寫記를 통해 1867년에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1면 우측 상단에 ‘李王家圖書之章’, ‘李王職實錄編纂室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본서는 서양 오랑캐가 조선에 침범한 일과 서양의 邪敎(천주교)로 인해 벌어졌던 일들을 경계의 예로 삼고자 하였다. 매일의 전황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우선 병인년 7월 보름에 異樣船 한 척이 강화도 松亭에 쳐들어왔다. 이때 강화 유수 李寅夔가 마침 일이 있어 서울에 가 있었기 때문에 경력 金在獻朴熙景이 그곳으로 가서 사정을 물었다. 이양선에 타고 있던 戴拔(Oppert, 1882~?)과 汪文山 등이 프랑스 主敎를 죽인 까닭을 캐묻고 통상의 뜻을 묻는 등 프랑스 함대의 강화 출현과 이에 따른 협상 과정, 이들이 물러나게 된 과정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 경력 金是年·高忠厚·박희경 등이 대표가 되어 닷새의 말미를 주고 물러날 것을 협상했다. 이때 프랑스 쪽에서는 乾餠과 溫茶를 대접했고, 다음 날 우리 쪽에서는 포구로 오도록 하여 답례로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 커다란 대접에 술 세 잔을 주니 더 달라고 하여 다섯 잔을 마시고 이들 가운데 馮芝林이라는 자가 암벽에 시를 쓰고 돌아감으로써 함대가 일단 철수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이양선이 그달에 다시 평안도 대동강으로 갔다가 사람들에 의해 불탄 일, 8월 17일에 두 척의 이양선이 西江의 하류에 다시 나타난 이른바 2차 원정 등을 옛날 거란 등의 침입에 견주어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다시 황해도 柳川 근방에 이르러 아이들을 만나 은전을 주기도 했는데, 이때 옆에 있던 李枝蕃이라는 사람이 『논어』의 “부모가 계시면 멀리 놀러가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너희들은 먼 곳에서 왔으니 부모 형제도 없는가 보다.”라고 했다는 구체적인 일화도 기록되었다.
이에 9월 11일에 전국에 榜을 붙여 알리고 각 別將들로 하여금 赴援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忠義의 고장인 松都에서는 軍籍에 소속된 左右別騎士 480명, 步卒 3,030명, 각 읍에 있는 군교 4,500여 명, 대흥산성에 있는 軍額 720여 명, 礪峴鎭의 군액 680여 명, 白峙鎭 군액 410여 명, 泰安, 倉耜, 石屯 등지의 여러 군액들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강화도 남문 쪽으로 진격하여 진을 쳤는데, 당시 그곳 사람들은 모두 난을 피해 도망가서 마을이 텅 비었다. 12일 頷井浦 守防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양선 한 척이 巳時에 나타나 바닷물의 깊이를 측정하려고 월곶에서 山里浦, 堂頭浦, 함정포, 祖江, 柳川 등지를 다니다가 돌아갔는데, 배에는 15명이 타고 있었고 속도가 아주 빠르고 大椀口를 연달아서 通津, 영정포 쪽으로 쏘아대었다. 또한 삼경에 이르자 이양선 두 척이 함정포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약탈하는 일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도망갔다. 13일 아침에도 적병의 작은 배 한 척이 강화에서 교동으로 나아갔고, 16일 전황을 보면 적군이 越城의 뒤쪽으로 염탐을 하러 왔다가 아군의 군복을 입은 사람을 해치고 갔다. 17일에는 문수산성에서 불길이 솟아 海西 여러 곳의 지원 선박 12척이 예성강가에 이렀고, 山里浦 앞에 敵船 한 척이 나타났다. 18일에도 역시 산리포 앞에 적선 한 척이 나타나 그곳을 지나는 우리의 私船에 대완포를 쏘았다. 그리고 적장인 魯斯[로스]가 자칭 大英國의 大都督이라 부르며 산리포에 편지를 보내자 아군 쪽에서는 크고 작은 배 16척을 柳川浦로 출동시켰다. 다음으로 9월 19일에는 함정포守防哨官 韓德敎의 보고에 따르면 전날 갑곶진 앞에 敵船 두 척이 통진 쪽으로 갔는데, 통진 문수산성 서문 밖 강변에서 광주의 포수들이 적군 40~50명을 사살했다. 그러자 적군 10여 명이 서문으로 쳐들어와 주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갔다. 또한 같은 날 산리포 앞에 敵船 한 척이 나타나 대포를 쏘고 사라졌다.
특성 및 가치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전황과 이에 따른 조처들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다. 병인양요와 관련해서 포상을 받은 사람의 명단과 개성부에서 실시한 특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도 실려 있다. 병인양요에 관련된 사료로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
宋近洙, 『龍湖閑錄
梁憲洙, 『丙寅日記
日省錄

집필자

이민원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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