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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은친왕인존(垠親王印存)

기본정보

류    :
자부
작성주체    :
편자미상(編者未詳)
작성시기    :
1907 / 융희 1년
형태사항    :
크기: 24.8×16.7cm / 판본: 검인본(鈐印本) / 장정: 절첩장(折帖裝) / 수량: 1첩(帖)(5절(折)) /
청구기호    :
K3-574
M/F번호    :
MF16-328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英親王 李垠(1897~1970)의 사인을 모아 찍은 인보이다.
서지사항
英親王 李垠(1897-1970)의 印存이다. 서명은 表紙書名에 근거하였다. 황색 비단으로 장황된 표지에 朱色 테두리가 덧대어진 비단 題簽을 사용했다. 折帖本으로, 帖裝 書背를 비단으로 함께 감싸고 있다. 인장 상단에 종이를 오려붙여 印影을 가렸다.
체제 및 내용
인보의 내용은 주로 이은의 字號印을 비롯하여 皇太子印 및 詞句印이 대부분으로 모두 11과를 실었다. 李垠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高宗의 繼妃인 純獻皇貴妃 嚴氏이며 순종과는 이복형제이다. 1907년 7월 고종이 황태자에게 양위하자 皇弟였던 그가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 해 12월 이토히로부미[伊藤搏文] 통감에 의해 유학이란 명목 아래 일본에 인질로 갔다. 1920년 4월 일제의 조선 흡수정책에 의해 일본 왕족 나시모토 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이후 주로 일본 육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63년 환국하여 국적을 회복하였다.
이은의 공식 책봉명은 ‘英王’이다. 인보의 제첨에 보이는 ‘垠親王’은 ‘李垠’의 이름에 ‘親王’을 붙인 방식으로, 일본에서 왕족들을 천황가와 구분하고 신분을 낮추기 위하여 그들의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이다. 또한 수록된 각 인영의 印風도 당시 우리나라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종이 또한 일본식 석인판 절지문양지이므로 이 인장들과 인보의 제작이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근대 전각가 河井筌가 새긴 ‘李王垠印’과 ‘明神齋’가 이 인보에 실린 각풍과 유사한 전각으로 남아있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 인보에는 일반적으로 성인이 갖는 字印과 堂號印이 여럿 있다. 영친왕은 11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에 끌려갔기 때문에 이 인보는 성인이 된 이후 일본에 있을 당시 제작되어 이후 국내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수록된 인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皇太子垠光而明新齋(양각방인)·皇太子章(음각방인)·讀古人書友天下士(양각장방인)·明新齋(양각방인)·垠親王印(양각방인)·悳潤身(음각타원인)·垠親王印(음각방인)·明新齊(양각방인)·垠親王章(음각방인)·明新齋(양각방인)·□□栗(양각장방인)
특성 및 가치
영친왕 이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자호를 확인할 수 있고 그의 사인을 망라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순종의 황태자시절 사인을 모은 장서각에 소장된 『銅章』(K3-559)과 더불어 대한제국기 황태자의 인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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