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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자료UCI : G002+KSMC+KSM-WO.0000.0000-20190313.B02416402_1-DES.200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박지원(朴趾源) 찬(撰)
작성시기    :
1780 / 정조 4년
형태사항    :
크기: 32.4×21.5cm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26권(卷) 12책(冊) / 인장정보: 帝室圖書之章,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4531
M/F번호    :
MF35-716, 971~972
기록시기    :
1780年(正祖 4) 以後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1780년(정조 4) 청 건륭제(재위 1735~1796)의 70세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겸사은사행의 정사 박명원의 자제군관으로 동행한 박지원이 저술한 연행록이다.
서지사항
 권수제는 ‘燕巖集 卷之~, 熱河日記 㢧~’으로 되어 있고, 표제와 서근제가 ‘熱河日記’이다. 표지 장황은 황색 종이에 斜格卍字 문양이 있는 것이고, 주황색 실로 선장하였다. 책마다 앞표지 우측에 소제목을 적어놓았다. 본문은 괘선이 없는 백지에 10행 20자에 맞추어 반듯한 해서로 필사하였다. 간혹 상단에 두주가 달려 있고, 단어를 설명하는 표시로 띠지를 붙여놓았다. 본문은 청색이나 흑색 볼펜으로 모든 책에 구두점을 표시하였다. 지질은 얇지만 매끈한 楮紙를 사용하였다. 책수는 26권 12책이다. 인장은 본문 첫 면에 ‘帝室圖書之章’, ‘李王家圖書之章’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열하일기』 제1 「도강록」은 1780년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에서 요양까지 15일 동안의 노정이다. 제2 「성경잡지」는 7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 심리하에서 소측산까지 5일 동안의 노정으로 성경가람기, 栗在夜話, 商樓夜話, 古董錄, 요동백탑기, 廣祐寺記, 舊遼陽記, 山川紀略, 遼東關廟記로 구성되었다. 제3 「馹迅隨筆」은 7월 15일부터 신광녕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7월 23일까지 9일의 노정으로 북진묘기, 車制, 戲臺, 市肆, 店舍, 교량, 강녀묘기, 장대기, 산해관기로 구성되었다. 제4 「관내정사」는 7월 24일부터 8월 4일까지 山海關 內에서 皇京까지 11일의 노정으로 열상화보, 이제묘기, 灤河泛舟記, 사호석기, 호질, 동악묘기로 구성되었다. 제5 「막북행정록」은 8월 5일부터 8월 8일까지 노정이며, 제6 「태학유관록」은 8월 9일부터 8월 14일까지 노정이다. 제7 「還燕道中錄」, 제8 「傾蓋錄」, 제9 「황교문답」, 제10 「반선시말」, 제11 「札什倫布」, 제12 「망양록」, 제13 「審勢編」, 제14 「鵠汀筆談」, 제15 「산장잡기」는 夜出古北口, 一夜九渡河記, 象記, 乘龜仙人行雨記, 만년춘등기, 매화포기, 蠟嘴鳥記, 만국진공기로 구성되었다. 제16 「환희기」, 제17 「피서록」, 제18 「행재잡록」은 「札什倫布」 下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戲本名目은 「산장잡기」 中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20 「口外異聞」, 제22 「金蓼小抄」는 정본에서 누락된 부분이다. 제23 「황도기략」, 제24 「알성퇴술」, 제25 「앙엽기」, 제26 「동란섭필」로 구성되었다.
 1780년 8월 1일 박지원 일행은 여느 조선 사절과 같이 중국 사행의 최종 목적지인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건륭제는 5월 22일부터 북경을 떠나 열하피서산장에서 머물고 있던 터였다. 이에 건륭제는 이례적으로 조선 사신에게 열하까지 와서 만수절 하례 표문을 전달하도록 하였고, 8월 5일 정사 박명원은 부사 정원시, 서장관, 통역을 담당한 대통관 3명 등 총 74명을 꾸려 황급히 북경을 출발하였다.
 북경에서 동북으로 회유, 밀운, 고북구를 거쳐 열하까지 5일 동안 밤낮없이 달린 길 위에서 조선 사절단은 ‘進貢’ 깃발을 꽂은 채 황제에게 바칠 공물을 싣고 사방을 가득 메운 수레와 노새·말·낙타 등의 방울 소리, 벌판을 울리는 채찍 소리에 압도당하였다. 또한 원숭이와 표범, 타조 등 조선에서 보기 어려운 이국적 짐승을 비롯하여 보물, 옥기, 珊瑚樹 같은 진귀한 공물도 구경할 수 있었다.
 1780년 8월 9일 열하에 도착한 박명원 일행은 북경의 체제를 본떠 1779년 준공된 열하 국자감(태학)의 행각과 재실에서 8월 14일까지 6일 동안 머물렀다. 건륭제조선 사절이 열하에 들어오자 고위관료인 군기대신을 보내 맞이하게 하고, 8월 12일 의 3품 이상 대신들만 관람 가능한 무대 공연을 조선 사신들도 함께 관람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하유하여 조선의 공물을 견감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8월 13일 황제의 만수절 축하 의례에서도 조선 정사 박명원 조정 2품 대신 반열 끝에, 부사 정원시는 3품 대신 반열 끝에 서게 하는 등 각별히 배려하였다. 조선 사신은 1780년 8월 12일 건륭제의 명령으로 수미복수지묘에서 판첸라마를 만났다. 당시 건륭제와 황자까지 판첸라마에게 예를 갖춰 머리를 조아렸으나, 조선 사신들은 판첸라마에게 예를 표하라는  예부상서의 말을 짐짓 모른 체하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박지원청 건륭제티베트판첸라마를 法師로 섬기는 실상이 종교를 이용하여 사방을 제어하는 교묘한 방법임을 간파하였다.
 당시 조선 삼사는 판첸라마에게 선물받은 호신용 銅佛, 서장향, 붉은 탄자, 목에 둘러 축복해주는 까탁 등을 관소인 국자감에 가져갈 수 없어, 역관을 시켜 은 90냥에 팔게 하여 마부들의 술값으로 주려 하였으나 마부들마저 이를 거부하였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인들에게 변방 夷敎 승려에게 예를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선물받은 종교적 기념물 또한 상서롭지 못하고 처치 곤란한 물건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특성 및 가치
 조선시대 중국에 파견된 사절 중 열하의 피서산장을 방문한 사례는 모두 세 차례이다. 1780년1790년청 건륭제의 70세와 80세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행이 있었고, 1860년 9월 영불연합군의 북경 침략으로 청 함풍제열하에 오랫동안 머물자 조선에서 황제의 안위를 묻기 위해 1861년에 ‘열하문안사’를 파견하였다. 1780년 박지원『열하일기』는 18세기 말 북경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제2 정치수도인 열하피서산장에서 견문한 기록이 자세하여 티베트 판첸라마와의 만남, 몽고에 대한 의 종교적 전략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료이다.
집필자
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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