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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노봉연행기병시(老峰燕行記幷詩)

자료UCI : G002+KSMC+KSM-WO.0000.0000-20190313.B02416402_1-DES.186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민정중(閔鼎重) 찬(撰)
작성시기    :
[1670] / 현종 11년
형태사항    :
크기: 27.0×18.8cm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인장정보: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4517
M/F번호    :
MF35-2190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1669년(현종 10) 10월 동지사청나라를 사행한 閔鼎重(1628~1692)의 연행록과 시를 함께 엮은 자료이다.
서지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제는 ‘老峰燕行記’, 권수제는 ‘老峰燕行記幷詩’이다. 황색 표지의 線裝本으로, 斜格卍字 문양이 있다. 표지의 좌측 상단에 표제가, 우측 상단에 ‘幷詩’라는 글이 기재되어 있다. 본문의 필사에 無郭, 無絲欄, 無版心의 楮紙를 사용하였다. 본문 중 일부 항목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 설명하기도 했다. 본문 가운데 잘못 기재한 부분을 잘라내고 뒤에 종이를 덧붙여 수정한 흔적이 있다. 본문 첫 장 우측 상단에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1669년 10월 18일 閔鼎重은 동지사행의 정사로, 權尙矩은 부사로, 愼景尹은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현종에게 사폐한 후 사행길에 올랐다. 날짜별로 주요 일지를 작성하였는데, 각 날짜는 干支로 표기하였다. 11월 1일 평양에서 망궐례를 행하고, 11월 2일에 단군묘기자묘, 기자서원을 참배한 후 을밀대, 부벽루 등을 둘러보았다.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 도독 李如柏의 화상을 모신 武烈祠를 참배하였다. 11월 5일 안주부에 이르고, 11월 9일 정주, 11월 12일 선천, 11월 13일 거련관에서 유숙한 후 14일 의주 소곶관에 도착하여 11월 17일 의주 통군정에 올랐고, 11월 18일 구룡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의주에서 7일을 머물고, 날씨가 점차 풀리자 압록강 얼음 위에 浮橋를 설치하여 중강을 건넜다. 11월 24일 봉황성 책문에 도착하여 12월 5일 고평, 12월 7일 요동벌판을 지나 12월 8일 소릉하를 지났다. 12월 9일 영원에서 조대수의 무너진 고택을 보고, 12월 11일 산해관에 들어가 망해루를 구경하였다. 이날 청나라 사신이 황극전의 개축을 낙성한 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12월 15이 塑像이 안치된 이제묘에 참배하고, 저녁에 사하역에 이르렀으나 찰원이 폐지되어 한인 姜弼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12월 17일 풍윤현, 12월 18일 옥전현에서 수재 王公濯의 집에서 유숙하며 필담하였다. 12월 21일 통주, 12월 22일 조양문 동악묘에 도착하여 王右軍의 集字, 조맹부의 해서, 동기창의 행초, 虞集의 팔분체 석비를 본 후 옥하관에 이르렀다. 이전 사행은 말을 타고 입관하였으나 청조명조의 舊例를 요구하여 사행은 관문 밖에서 말에서 내려야 했다. 12월 23일 아침 예부에 표자문을 전하였는데, 전에는 역관이 가서 전하였으나 에서는 사신이 직접 전하게 하였다. 또한 명초에는 외국 사신들은 모두 가마를 탈 수 있었으나 조선 사신들이 陪臣으로 자처하여 황성에서 가마를 타지 않았는데, 이를 『대명회전』에 실었다. 따라서 민정중 일행도 황성에서 가마를 탈 수 없었는데, 이는 안남의 사신들이 말을 타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씁쓸한 일이었다. 12월 27일 관소에서 正朝禮를 습의하였다. 이날 역관 朴而巀의 종이 病死하였다. 1647년 사신 이하는 홍려시에 가서 한인을 뽑아 구례에 의거하여 삼궤구고두를 습례하였으나, 근래에는 청인이 주관하여 습례하였다.
 1670년 1월 1일 조선 사신들은 태화전에서 서반 3품에 해당하는 제3행의 끝에서 정조례를 마치고 殿簷 아래 앉아 駱茶를 마시는 다례를 행하였다. 조선 사신 아래 몽고 사신도 와 있었다. 1월 4일 주객사낭중 청인 1명이 『대명회전』을 가져와 내용 중 種馬가 3년마다 50필인데 어느 해의 일인지 묻자, 역관에게 洪武 初年 명 태조가 진노하여 공마의 수를 특별히 늘이고 조선에서 지성으로 事大하고 있다고 답하게 하였다. 역관이 말하기를, 황제 강희제호부예부에게 조선 문서를 보고 태종, 세조 때 감소한 것은 왜인가 물었고, 명조에서는 납공 수가 얼마인지 알고 싶어 하였기 때문에 예부에서 물었다고 하였다. 1월 6일 화사 程龍一이 와서 알현하여 초상을 그릴 것을 허락받기를 원하여 필묵 草本으로 試肖한 것을 요구하고 종이를 내려주었다. 1월 7일 한인 曲顚子 蔡漚蝢에게 운세를 논할 것을 의뢰하였고, 1월 8일 방물과 세폐를 탕고에 수납하였다. 1월 9일 황제가 조묘에 참배하고, 1월 10일 천단에 친제하였다. 1월 18일 곡전자로부터 운세를 논한 두루마리를 전달받았다. 1월 19일 화사 정용일이 초상 초본을 가져와서 군관, 역관 등이 살펴보고 말하기를 대략 닮아 그럴듯하지만 아주 닮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정용일이 말하기를, 6개월 정도가 소요되어야 완성되니 의당 뒷날 사행에게 보내줄 것이고 만약 닮지 않는다면 대가는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1월 20일 반전과 각종 물품을 사절단 일행에게 분급하고, 1월 21일 에서 榜을 붙여 開市하도록 하였다. 1월 22일 예부에서 하마연을 베풀었고, 1월 25일 오문에서 정관에게 회송 예물을, 종인에게도 贈物하였다. 예부우시랑 曺申吉옥하관에 와서 상마연을 베풀었다. 1월 27일 에서 비로소 출발을 허락하여, 1월 28일 조양문을 나와 동악묘에서 잠시 쉬었다가 駕轎에 올라 통주에 이르렀다. 2월 1일 옥전, 2월 4일 영평, 2월 5일 산해관, 2월 8일 영원위, 2월 11일 광녕, 2월 18일 통원보에서 평안감사의주부윤의 편지를 접하였는데, 從妹 鄭佐郞의 內室과 妹壻인 洪叔平의 喪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들에 휘장을 친 다음에 차례로 곡을 하였다. 2월 19일 봉황성, 2월 20일 책문에 도착하여 봉황산 아래 노숙한 후에 2월 21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하였다. 2월 23일 문견별단을 修上하였다. 본문에서 황제는 ‘淸主’로, 역관을 ‘牙譯’이라 지칭한 것이 특징이다.
 연행 노정별 일기 다음에 실린 「聞見別錄」에는 사행 과정에서 수집한 황제와 황실을 비롯한 팔기군, 심양황릉 공역, 자금성 改修, 청나라 팔기군제와 갑군, 喪制, 몽고와의 관계, 한족에 대한 대우, 친왕 오삼계, 영고탑에 대한 인식 등 주요 정보를 기록하였고, 사행에서 만난 한인들과 나눈 문답 내용을 중심으로 민간 풍속 등을 기록하여 17세기 중후반 청나라의 정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바로 뒤에는 玉秀才, 顔知縣 등과의 문답 4편이 실렸다. 특히 「回時問答」에서는 『대명회전』에 실린 주현생과 수재, 태학생의 복식을 문답하는 과정에서 명대 한인 의관 중 束帶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것이 인상적이다. 「顔知縣問答」은 廣寧知縣 顏鳳姿와의 문답으로, 안봉자는 자신의 시집 1권을 민정중에게 보내준 인물이었다.
 이어 산해관영원위의 대성전 신위 위차를 문반차도로 차례로 설명하였는데, 영원위의 위차에 대성전은 있으나 동무와 서무가 없는 것은 난 이후에 훼손되었기 때문으로 조선에도 이와 같이 兩廡가 없다. 병란 이후 청인이 尊祀를 복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치가 뒤바뀌어 질서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그 다음에는 「酒壚」, 「臥佛寺」, 「連山關」을 비롯하여 노정에서 지은 시 18편, 차운시 3편, 경상도관찰사였던 큰형님과 평안도관찰사였던 막내 동생에게 보낸 서간시 2편을 실었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연행일기, 연행시, 필담으로 주고받은 문답, 가족에게 보낸 문답을 비롯하여 연행 후에 조정에 올린 「문견별록」까지 함께 엮인 연행록의 종합판으로, 강희 연간 청나라의 사정을 상술한 점에서 의미 있는 사료이다. 본서의 내용 중 연행일기와 문견별록, 노정 문답과 대성전 위차는 민정중의 문집인 『노봉집』 권10의 잡저에 실려 있으며, 연행시는 『노봉집』 권1의 시편에 실려 있다.
집필자
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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