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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축당실적(三祝堂實蹟)

자료UCI : G002+KSMC+KSM-WO.0000.0000-20190313.B02416402_1-DES.086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안승채(安承采) 편(編)
작성시기    :
1894 / 고종 31년
형태사항    :
크기: 30.6×20.0cm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1.3×15.3㎝ / 인장정보: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4369
M/F번호    :
MF35-2190, MF16-313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三祝堂을 건립한 후 安承采가 그것과 관련한 기록들을 모아 1894년(고종 31)에 편찬한 책자이다.
서지사항
 표제가 ‘三祝堂實蹟’으로 서명은 표제를 따른다. 표지 장황은 선분홍색 종이에 斜格卍字 문양이 있으며, 표제는 붓으로 쓴 파란색 첨지를 붙여놓았다. 장정은 얇은 하얀색 실을 사용하여 5침안으로 선장하였다. 본문의 판식은 8행의 괘선을 붓으로 직접 그었다. 본문의 글씨는 8행 16자에 맞추어 반듯한 해서로 적은 필사본이다. 지질은 일반적인 楮紙이다. 책수는 17장 1책이다. 표지 이면에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三祝堂安鍾弼경인년(1890) 봄에 大聖山 聖主洞(현 충청북도 옥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처음에 단을 쌓아 지내다가 비바람을 막기 위해 고종에게 하사받아 두 칸짜리 건물을 짓고 ‘삼축당’이라 이름 지었다. 『三祝堂實蹟』은 삼축당을 건립한 후에 안종필의 아들 安承采가 이와 관련한 기록들을 모아 책자로 만든 것이다.
 『삼축당실적』에 실린 1893년에 작성한 閔致純의 ③ 三祝堂記에 따르면, 1890년 閔致純朱溪 수령으로 부임하러 갈 때 대성산 寧國寺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 산세가 신묘하여 형세가 천황을 중심으로 여러 신하들이 둘러서 바라보는 모습을 띄고 있다고 하였다. 마침 안종필이 堂圖를 가지고 와서 신라莊王몽고를 피한 곳이기도 하고, 고려仁宗이 스승을 찾아 액막이를 했던 곳이라 하면서 태평한 나라의 복을 빌 수 있는 장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해에 단을 설치하고 치성을 드렸고, 풍우를 피하기 위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두 칸짜리 건물을 하사받고는 ‘三祝’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삼축이란 『莊子』 제12편 「天地」에 나오는 내용으로, 華封人이 임금에게 長壽와 富를 기원하고 아들을 많이 낳으라고 올린 세 가지 축원을 말한다. 즉 화봉인이 임금에게 올린 축원처럼 안종필 자신도 국왕인 고종에게 이를 바라고 올린 것이다.
 『삼축당실적』의 본문에 적힌 목록은 총 12개로 다음과 같다.
 ① 三祝堂開基告由文(1893. 9. 27)
 ② 三祝堂上樑文(副司果 安鍾弼 / 1893. 10)
 ③ 三祝堂記(通訓大夫行陜川郡守 閔致純 / 1893. 6)
 ④ 三祝堂銘(通訓大夫行文義縣令 洪亮燮 / 1894. 1. 7)
 ⑤ 三祝堂頌(通仕郎前西部都事 宋肯洙 / 1894. 1. 7)
 ⑥ 三祝堂賦(幼學 安承采 / 1894. 1. 7)
 ⑦ 三祝堂詩(安鍾弼, 安秉喆, 安承采)
 ⑧ 三祝堂儀式
 ⑨ 祝辭
 ⑩ 鍮器
 ⑪ 永同麻谷畓案
 ⑫ 謹書三祝堂實蹟後(副司果 安鍾弼 / 1894. 1)
 각 항목의 기록된 연도를 살펴보면, 고유문과 상량문 등은 1893년에 작성한 것이고, 부와 시 등은 1894년 1월 7일에 작성하였다. 1893년삼축당 건물을 완성한 시점으로 보이고, 1월 7일은 人日에 맞추어 제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인일은 음력 1월 7일로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다. 민속에서는 외출을 삼가고 근신하며 편안히 지내는 여러 행위들을 한다.
 삼축당에 속한 전답의 규모는 ⑪ 永同麻谷畓案을 통해 알 수 있다. 영동마곡답안은 명례궁, 옥천관아, 영국사에 1건씩 나누어 보관하며, 추수할 때가 되면 사찰 승려에게 1섬 당 7말의 쌀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 논의 총합은 驅, 轂, 振, 侈자 논 22마지기에서 15섬 14말의 賭租를 거두어들이고, 結卜는 59負 1束이다. 또 애초에 1890년 옥천군수가 839냥을 내었으므로, 이를 가지고 땅을 사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중에 지출 비용으로 6섬은 7일에 치성을 위해 사용하고, 4섬은 佛供으로 시주하고, 3섬은 堂宇를 수호하기 위해 쓰고, 2섬 14말은 散用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종필이 단을 쌓아 국왕에게 축원한 의도에 대해서는 송긍수의 ⑤ 三祝堂頌에서 엿볼 수 있다. 안종필의 송축은 일반적인 기원이 아니었고, 본원적인 의도는 동궁이 후손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동궁은 순종(1874~1926)으로, 후사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순종고종의 차자로 1875년 세자로 책봉되고, 1890년 10월에는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皇太子에 책봉되었다. 결론적으로 삼축당의 의미는, 서양의 열강들이 개항을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국태민안과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한편으로, 왕실의 자손이 많아져서 성대한 덕업을 이루길 바라는 염원도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특성 및 가치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와 이를 막으려는 보수의 대립이 팽팽한 시기였다. 조선 왕실이 새로운 시대를 맞아 나라를 인도할 능력을 시험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나라의 안위와 왕실의 번창을 축원하는 충심의 발로에서 만들어진 것이 삼축당이다. 『三祝堂實蹟』을 통해 삼축당의 건립 의도와 위치, 운영 규모를 상세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莊子
王賢鍾, 「대한제국기 고종의 황제권 강화와 개혁 논리」, 『역사학보』 208, 2010.
집필자
박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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