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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경현당여세손회강략기(御製景賢堂與世孫會講略記)

자료UCI : G002+KSMC+KSM-WO.0000.0000-20190313.B02416402_1-DES.094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영조(英祖) 어제(御製), 민백흥(閔百興) 봉교서(奉敎書)
작성시기    :
1762 / 영조 38년
형태사항    :
크기: 48.3×28.3cm / 판본: 탁인본(拓印本)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
청구기호    :
K2-4376
M/F번호    :
MF35-4866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1762년(영조 38) 3월 29일에 영조(1694~1776)가 世孫인 정조(1752~1800)를 데리고 慶熙宮景賢堂에 가서 會講한 것을 기록한 탁본첩이다.
서지사항
 본문 첫 장의 탁본 서명이 ‘御製景賢堂與世孫會講略記’이고, 표제는 ‘御製景賢堂會講略記’이다. 표지 장황은 황색 종이에 斜格卍字 문양이 있는 것이고, 서배를 감싼 호접장이다. 표제는 흰색 비단에 붉은색 테두리를 하고 붓으로 쓴 첨지를 앞표지 중앙에 붙여놓았다. 본문은 탁본한 것을 8행 23자에 맞추어 잘라 붙이고, 청색 비단으로 테두리를 마무리하였다. 책수는 3절 1첩이다.
체제 및 내용
 1762년 3월 29일 午時에 영조가 당시 세손인 정조景賢堂에 데리고 가서 會講한 것을 기록한 탁본첩이다. 왕세자나 왕세손의 회강이란 매달 국왕과 사부 이하 관원들 앞에서 그간의 교육 정도를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회강은 조선 후기에 세자의 나이 11세가 되면 매달 2일과 16일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講書院日錄』에는 정조가 7세인 1758년 4월 7일부터 시작하여 9세가 되던 1760년 6월 23일까지 기존에 배운 『小學』을 다시금 강학하였고, 1760년 6월 25일부터 8월 29일까지 『大學』을 강학한 것으로 나온다. 『대학』은 이후에도 4번을 더 강학하였다. 1762년영조가 마침 경희궁에 온 정조를 데리고 경현당에서 회강을 시행한 것이다.
 본 책에서 영조정조를 데리고 회강하는 내용의 대강을 볼 수 있으며, 『영조실록』에는 두 사람 간의 질문과 답변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본 책에 실린 강학 순서를 대략 살펴보면, 첫째로 영조『대학』을 강하고 세손은 『소학』을 강하였다. 둘째로 영조 자신이 먼저 『대학』의 주자서문을 읽고, 입시한 두 承宣과 두 儒臣으로 하여금 차례대로 經 1장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과 문답을 한다. 셋째로 세손이 『소학』 書題를 읽고, 諭善과 講書院 관원으로 하여금 立敎편을 읽게 하였다. 읽고 어려운 곳이 있으면 영조가 묻고 세손이 물음에 따라 답을 하였는데 영특한 대답을 하였다. 이처럼 탁본첩의 앞부분에는 세손과 강회하는 모습을 언급하고, 뒷부분은 영조가 세손과 신료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적어놓았다.
 즉 세손에게 공부에 있어 유종의 미를 거두어 방탕한 곳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하고, 강서를 맡은 신료들에게는 잘 보도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입시한 承宣에게 회강 내용을 잘 적게 하고, 끝에 입시한 신하들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다. 원본은 새겨서 강서원에 걸어두고, 이를 탁본하고 장첩하게 하여 內入, 東宮, 世孫宮, 講書院, 史閣에 1건씩 보관하게 하고, 참석한 여러 신하들에게도 1부씩 주었다. 그러므로 이를 합하면 본첩은 총 24부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글씨는 閔百興(1714~1774)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 당시 입시한 신하들은 領事 洪鳳漢·尹東度, 知事 韓翼謩, 同知事 徐命臣, 參贊官 李顯重·閔百興, 侍講官 金鍾正, 檢討官 嚴璘, 假注書 李亨元, 記事官 林德躋·李致中, 兼左諭善 鄭宲, 左翊善 洪述海, 兼右翊善 金鍾正, 左贊讀 洪樂仁, 兼右贊讀 李在協, 禮曹判書 申晦, 禮曹叅判 金時默, 編次人 具允明으로 총 19명이다.
 이때가 정조 나이 11세가 되는 시점이므로 처음으로 회강한 것으로 보이며, 『영조실록』에 다음달 4월 25일에도 똑같이 회강한 후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영조는 세자인 사도세자(1735~1762)와 관계가 좋지 않은 시점이다. 그 갈등이 극에 달하여 같은 해 윤5월 13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임오화변이 일어난다. 본 첩을 새겨 강서원에 걸어두었다는 점에서 영조정조에 대한 신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성 및 가치
 본 첩은 영조가 세손과 함께 회강에 참석한 것을 기록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 왕세손 교육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왕실 행사의 기록물을 생성하는 과정과 범위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장서각소장 탁본자료해제 Ⅱ-帖裝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육수화, 「『講書院日錄』을 통해 본 正祖의 世孫講書院 시절 교육 연구」, 『장서각』 13집, 2005.
집필자
박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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