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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고종어필선죽교비(高宗御筆善竹橋碑)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고종(高宗) 어제어필(御製御筆)
작성시기    :
1872 / 고종 9년
형태사항    :
크기: 35.5×24.1cm / 판본: 탁인판(拓印版)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
청구기호    :
K2-3899
M/F번호    :
MF16-308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1872년(고종 9) 고종이 직접 짓고 쓴 선죽교 비문을 탁본하여 장황한 帖이다.
서지사항
서명은 표지 서명을 따랐다. 표지 장황은 국화 무늬가 붉은 실로 수놓아진 녹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9折 帖裝으로 裝幀하였으며 책등을 감쌌던 면직물은 떨어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표지 제첨은 흰 비단 위에 墨書하였다. 본문의 종이는 壯紙를 사용하였으며 본문은 拓印하였다. 본문 중간 상단에 서명을 적은 첨지가 붙어 있다.
체제 및 내용
서첩의 앞부분은 篆書로 된 當宁御製御筆이라는 제목이 있으며 다음에는 비문의 앞부분 중앙에 縱書로 “危忠大節光宇宙 吾道東方賴有公”이라는 글귀를 나열하였다. 한 행에 3字로 구성하여 한 면에 2行으로 편집하였다.
서첩의 뒷부분은 비문의 뒷면에 있는 陰記를 편집하였다. 한 행에 3字를 두었으며 隔字를 시행하는 대신 한 자를 올려 4字를 구성하였다. 한 면은 3行으로 편집되어 있다. 陰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조선을 건국한 지 8甲이 되었으며 이에 고종은 스스로 재릉후릉 등을 배알하고 개성의 古都에 이르러 문묘에 참배를 하였으며 穆淸殿 등을 들러보았다. 또한 선죽교를 바라보았는데 핏자국이 새것처럼 뚜렷하였다. 이에 정몽주의 충정과 도덕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회되었으며 이미 5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尊慕하게 되었으니 동방의 大賢 중에서도 으뜸이 되었다. 고종이 스스로 정몽주를 스승으로 삼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하였다. 이에 영조가 지은 시에 차운을 하여 繼述하는 뜻을 다시금 새기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조의 시란 1770년(영조 46) 영조 또한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면서 그들의 자손을 서용하도록 하고 선죽교에 비석을 세운 일을 말한다. 이때 영조는 직접 지은 시를 비문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고종영조의 전례를 따라 자신 또한 영조가 세운 선죽교비 옆에 자신이 세운 선죽교비를 세웠던 것이다.
고종1872년(고종 9) 3월 6일 개성을 직접 찾았다. 그는 경덕궁 목청전의 옛터에 나아가 전배를 하고 환궁하는 길로 선죽교에 잠시 들러 영조가 친필로 세워둔 비각을 奉審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874년(고종 11) 4월 선죽교고종의 어필 비각을 세우는 데 참여한 관원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비문을 세우는 공사가 이때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특성 및 가치
 고종은 정국 초기에 직접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노력들을 보였다. 특히 개성 방문은 직접 조선 개국의 기원을 찾고 그것을 되새기면서 선조가 남긴 여러 유훈들을 직접 눈으로 찾아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선죽교비의 설립은 고종영조의 업적을 잇고 정몽주의 절개를 다시금 각인시키는 정치적 행적의 일부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英祖實錄』
집필자
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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