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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숭정사기축경과정시문무과방목(崇禎四己丑慶科庭試文武科榜目)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예조(禮曹) 편(編)
작성시기    :
1843 / 헌종 9년
형태사항    :
크기: 34.8×22.2cm / 판본: 정유자혼입목활자판(丁酉字混入木活字版)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5.0×17.0㎝ / 인장정보: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3544
M/F번호    :
MF35-1895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1829년(순조 29) 순조의 나이 40이 되고, 왕위에 오른 지 30주년이 된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설행한 慶科로서의 庭試 문과·무과에서 합격한 급제자 명부이다.
서지사항
권수제는 ‘崇禎四己丑慶科庭試文武科榜目’이고, 서명은 권수제에 근거하였다. 판심제는 ‘己丑庭試榜目’이다. 표지 서명과 서근제는 ‘慶科文武榜目’이고, 표지 서명 하단과 서근에 冊次 ‘全’이 표기되어 있다. 표지 장황은 황색 표지에 斜格卍字紋이 있고, 서명은 직접 묵서하여 백색 실로 線裝하였다. 본문의 판식은 丁酉字混入木活字版으로 四周單邊에 上內向二葉花紋魚尾이고 字數는 10行 18字이다. 책 수는 1冊 87張이다. 書眉에 頭註가 함께 인쇄되어 있고, 판심 상단에 편명이, 하단에는 張次가 판각되어 있다. 본문의 종이는 楮紙를 사용하였다. 권말에 ‘癸卯(1843)仲夏 芸閣活印 崇禎四己丑(1829)慶科庭試文武科榜目終’이라는 기록이 있다. 인장은 제1면 우측 상단에 正方形 ‘李王家圖書之章’을 날인하였고, 우측 하단에 長方形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방목의 체제는 庭試 설행 동기, 科名, 문과시험 시관[恩門], 순조가 직접 내린 시험문제[御製], 무과시험 시관, 시험과목, 문과급제자와 무과급제자 명단, 방목 간행 정보 등이다.
1829년(순조 29) 설행된 정시는 순조에게 국왕의 나이가 40이 되고, 왕위에 오른 지 30주년이 된 기쁨을 전국의 백성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설행되었다. 정시는 문과와 무과만이 설행되는 시험이었다. 문과의 경우는 예조에서 관장하고, 무과는 병조에서 관장하였다.
정시문과는 1회의 殿試만을 치르기도 하고, 初試와 殿試 2회의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다. 원래 정시는 정식 과거는 아니었다. 국왕이 성균관 유생의 학업 동기를 높이기 위해서 유생들을 궁궐 내로 불러서 치르던 課試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점차 정식 과거시험으로 발전되면서, 시험 체제도 규정화되었다. 정시문과는 1회의 전시만을 치르던 것이 초시와 전시 등 2회의 시험을 통해서 급제자를 선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품지에 따라 1회의 전시시험으로만 할 것인지 아니면 초시와 전시를 다 치를 것인지가 결정되었다. 1회의 전시만을 시행할 경우에는 시험이 설행된 당일에 국왕의 친림하에 방방을 시행하는 것이 전례가 되었다. 정시무과는 초시와 전시로 구분하여서 시행되었다. 초시 합격 인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국왕의 품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1829년에 시행된 정시문과는 순조의 명에 따라 1회의 전시만을 치렀다. 시험 일자는 여러 차례 연기되어서 10월 18일에 시행되었다. 판돈녕부사 金在昌이 命官으로 차정되어 문과를 주관하였다. 전시의 시관은 讀券官과 對讀官으로 구분된다. 이 당시 독권관은 명관 판돈녕부사 김재창을 위시하여 호조판서 趙萬永, 이조판서 金鏴, 예조판서 洪起爕, 이조참판 鄭基善 등 19명, 대독관은 돈녕부 도정 李道在, 부호군 金敎善, 부호군 趙冀永, 부호군 尹秉烈, 대사성 安光直 등 30명이었다. 순조가 내린 시제는 서울 응시자에게는 “擬虞朝群臣 賀關西門 有一家氣像”이라는 表를, 지방 응시자에게는 “濟濟多士文王以寧”이란 제목의 賦이었다.
시험은 춘당대에서 치러졌으며, 왕세자가 시좌하였다. 정시문과에서는 서울 응시자 중 5명, 그리고 지방 응시자 중 10명 등 15명을 선발하였으나, 이 시험이 있기 전에 있었던 여러 과시에서 殿試 직부를 받은 사람 27명을 포함하여 총 42명을 선발하였다.
정시무과는 순조의 명에 따라 초시 합격 인원을 300명으로 정하였으며, 9월 28일 초시가 시행되었다. 초시는 서울에서 시행되었다. 1소 시험장은 모화관이었다. 시관은 호군 柳相亮 등 3명, 참시관은 사과 任百能 등 3명 총 6명이었다. 2소 시험장은 훈련원이었다. 시관은 호군 李瀅夏 등 3명 참시관은 이조정랑 李敦夏 등 3명 총 6명이었다. 초시 시험 규식은 기예와 講書로 나뉜다. 기예 시험은 ① 木箭 3矢 240보, 鐵箭 3矢 130보, 片箭 3矢 130보로 1巡 1中, ② 유엽전 5矢 120보로 1巡 2中, ③ 조총 3柄으로 1巡 2中 등 세 가지 기예이었다. 講書는 粗 이상 점수를 받아야 한다. 이들 과목 중에서 두 가지를 선택하여 응시하게 하였다. 초시 합격자는 10월 8일에 발표하였다.
전시는 10월 10일로 춘당대에서 시행되었다. 시관은 考官과 參考官으로 구분된다. 고관은 병조판서 徐俊輔 등 3명, 참고관은 부호군 尹秉烈 등 3명이었다. 전시 시험 과목은 초시와 마찬가지로 기예와 강서 시험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시험규식은 전시를 치르는 부류에 따라 달리 적용하였다. 첫째, 이번 정시무과 응시자와 각종 試才에서 會試直赴를 받은 사람은 ① 片箭 3矢 130보로 1巡 1中, ② 유엽전 5矢 120보로 1巡 2中 등 두 가지 기예 시험이었다. 강서 시험은 粗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한다. 이들 세 가지 시험 중에서 두 가지를 선택하여 응시하게 하였다. 둘째, 각종 試才에서 直赴殿試를 받은 사람은 ① 片箭 3矢 130보로 1巡 1中, ② 유엽전 5矢 120보로 1巡 1中 등 두 가지 기예 시험이었다. 강서 시험은 粗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한다. 이들 세 가지 시험 중에서 두 가지를 선택하여 응시하게 하였다. 전시 시험은 초시 시험보다 기예 시험 과목이 줄었으며, 특히 직부전시자에게는 시험규식이 관대하였다.
방방은 정시문과가 치러지는 10월 13일에 문과급제자와 함께하려 했으나, 마침 좌의정 李存秀가 사망하여 朝市를 정지하는 바람에 10월 18일 방방이 이루어졌다. 무과 역시 전시에 직부된 인원을 포함하여서 총 637명을 선발하였다.
방목에 실린 문과·무과급제자 정보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본인 정보와 가족 정보로 구분되어 있다. 문과급제자를 보면, 본인 정보는 ① 응시 당시 직역인 前歷, ② 字, ③ 생년, ④ 본관, ⑤ 거주지, ⑥ 최종시험 응시과목, ⑦ 급제자가 치러서 합격한 다른 시험의 정보(시험 종류와 시험 시기) 등이다. 가족 정보는 ① 부친의 직역, ② 부친의 이름, ③ 가족 현황(조부모와 부모 모두 생존[重侍下], 부모 모두 생존[具慶下], 아버지만 생존[儼侍下], 어머니만 생존[慈侍下], 부모가 모두 사망[永感下]), ④ 안항(문과에 급제한 형제) 등이다. 무과급제자의 경우 본인 정보는 ① 응시 당시 직역인 前歷, ② 나이, ③ 본관, ④ 거주지, 가족 정보는 ① 부친의 직역, ② 부친의 이름 등으로, 문과급제자에 비해서 매우 간단하였다.
정시는 1829년(순조 29)에 시행되었으나, 방목은 1843년(헌종 9)에 교서관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권30, 순조 29년 10월 13일(갑술); 10월 18일(기묘).
집필자
원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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