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입력기

자료열람

고서

병술후삼백구년갑오재등준시방(丙戌後三百九年甲午再登俊試榜)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영조(英祖) 명편(命編)
작성시기    :
1774 / 영조 50년
형태사항    :
크기: 33.8×21.8cm / 판본: 무신자판(戊申字版)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4.7×17.0㎝ / 인장정보: 李王家圖書之章,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청구기호    :
K2-3537
M/F번호    :
MF35-1895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1466년(세조 12)의 故事에 의거하여 1774년(영조 50) 영조근정전 옛터에서 시행한 일종의 重試인 登俊試 문·무과 방목이다.
서지사항
권수제는 ‘丙戌後三百九年甲午再登俊試榜’이고, 판심제, 서근제는 ‘再登俊試榜’이고, 표지 서명은 ‘登俊試榜’이다. 표지 장황은 황색 표지에 蓮花唐草紋이 있고, 서명은 표지에 직접 墨書하여 線裝하였다. 본문의 판식은 戊申字版으로 四周單邊 上內向二葉花紋魚尾이고, 字數는 10行 18字이다. 책 수는 1冊 26張이다. 본문의 종이는 일반적인 楮紙를 사용하였다. 교정한 흔적이 보이는데 해당 부분은 刀割한 후 여기에 동일 楮紙를 附添하고 글자를 날인하였다. 인장은 제1면 우측 상단에 ‘李王家圖書之章’을, 우측 하단에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본 방목의 체제는 1774년 1월 13일에서 1월 18일까지 내렸던 34건의 영조의 전교, 대사성 洪趾海가 지은 서문, 문과의 시제, 문과 시관, 문과방목, 무과 시험 규정, 무과 시관, 무과방목, 문·무과 급제자 등이 영조에게 올린 감사의 箋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774년영조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대소신료들이 영조에게 즉위한 지 50년이 된 것을 나라의 경사라고 하였으나, 영조 자신은 선대의 국왕들을 추모할 뿐이라 하였다. 국왕으로서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 녹녹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조는 나라를 일으키고 중흥시켰던 선대의 국왕들을 생각하였다. 그는 1월 15일에 선대의 국왕들이 추모하기 위해서 경복궁 문소전 옛터와 근정전 옛터에 나가서 전배를 행하고, 세조가 시행하였던 등준시를 309년 만에 치르겠다고 하였다.
등준시 응시대상은 세조가 그랬던 것처럼 종1품 이하의 동·서반 관료를 대상으로 하였다. 문과는 영조가 친히 ‘擬本朝經筵特進官 進二典三謨 於勤政殿前’ 시제 내어 箋으로 제술하게 하였다. 시관으로는 독권관 7명, 대독관 7명으로 총 14명이었으며, 입문관과 수권관은 각 2명씩으로 하였다. 독권관은 의정부·돈녕부·중추부의 정1품 관료가 5명, 종1품 관원이 2명이었으며, 대독관은 정2품 관원이 4명, 전임 대제학이 3명 등이었다. 입문관은 의정부검상 2명, 수권관은 이조 정랑 2명 등이었다.
문과급제자는 갑과 3명, 을과 3명, 병과 9명 등 15명이었다. 15명 전원이 문과급제자였으며, 동반관료로 재임하고 있는 사람이 6명, 서반관료로 재임하는 사람이 8명 그리고 전임 동반관료가 1명이었다. 영조는 문과 장원 행부사직 趙德成우윤에 제수하였다. 기로시에 급제했던 安집·宋載禧, 도승지 金應淳이 문과에 급제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가자하였다.
무과는 帿箭으로 과녁을 1번 명중시켜야 하는데 거리는 130보였다. 시관으로는 참시관 3명, 참고관 3명으로 하여서 갑과 1명, 을과 3명, 병과 14명을 선발하였다. 이들 18명 역시도 모두 무과급제자로서 현임 훈련대장, 금위영 대장, 부총관이, 전임 수사와 병사 등이 시험에 합격하였다. 영조는 무과 장원 李春琦에게 가자하여 가설 동지중추부사로서 군직에 차정하였다. 또한 시험에 합격한 현임 훈련대장 李章五금위영대장 李潤成도 가자되었다.
영조세조가 시행한 등준시에 합격했던 영순군 李溥의 12 대손인 李徽中이 합격한 것을 기이하게 여겨서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려서 영순군에게 치제하게 하였다. 또한 영조는 등준시 합격자들 가운데 인연이 있었던 그들의 선조들에게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려서 치제하게 하였다. 영조세조영순군 이부에게 했던 것처럼 문·무과 급제자 33명에게 모두 표리 一襲을 하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영조는 등준시의 과명을 ‘丙戌後三百九年甲午再登俊試榜’이라 칭하고 활자로 인쇄하게 하였다. 방목의 서문은 등준시의 급제자 중에서 짓게 하였다. 활자로 인쇄한 방목 1건은 궁궐에 두고, 1건은 세손궁에 두며, 5건은 사고에 보관하게 하였으며, 급제자 33명에게도 반사하여서 자신이 81세에 선대왕의 업적을 계술한 뜻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英祖實錄』
윤정, 「18세기 경복궁 유자의 행사와 의례-영조대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25, 2005.
집필자
원창애

PDF서비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