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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증자헌대부이조판서운천김선생시장(贈資憲大夫吏曹判書雲川金先生諡狀)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서정순(徐正淳) 찬(撰)
작성시기    :
1902 / 광무 6년
형태사항    :
크기: 38.0×25.3cm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 판식: 반곽(半郭) 28.0×22.3cm / 인장정보: 掌禮院印, 掌禮院卿之章, 藏書閣印, 權⊙印
청구기호    :
K2-828
M/F번호    :
MF35-1885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병조참의여주목사를 지내고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된 金涌에게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는 시장이다.
서지사항
四周雙邊, 半葉 8行, 無魚尾의 필사한 朱色 印札空冊紙를 사용한 필사본으로, 절첩의 형태로 粧䌙되어 있다. 表紙書名은 ‘金公涌諡狀’이다. 제3면 書眉에 ‘吏判金涌’이라고 적힌 籤紙가 부착되어 있다. 표지 및 도서 내부 곳곳에 蟲害가 있어 일부 배접되어 있다. 권말에는 1902년(광무 6) 2월 6일에 掌隷院에서 照訖을 마치고 奉常司로 보낸다는 내용의 문서가 粘連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김용에게 贈諡를 요청한 본 諡狀은 증직 사실 및 시장 작성 경위를 시작으로 김용의 先系, 생애 및 관직 생활, 임진왜란 시의 활약과 원종공신 2등 책록, 배위와 자녀 상황, 학행 등을 수록한 후, 그 대략을 모아 태상 씨에게 고한다고 하였다. 시장은 從一品 崇祿大夫 弘文館 學士 徐正淳1902년에 작성했다.
김용은 본관이 義城, 자는 道源, 호는 雲川이며, 증조는 禮範, 할아버지는 , 아버지는 찰방 守一이고, 학봉 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을 하다가 천연두가 발병해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검열·대교·奉敎, 성균관 典籍 등을 지냈다. 이어 正言·獻納·副修撰·持平 등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諸道都體察使 李元翼종사관으로 많은 활약을 했으며, 교리에 재임 중 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영의정 柳成龍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옮겨졌다. 이때 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濟用監正·世子弼善·執義 등의 중앙 관직과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지냈다. 1609년 奉常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그 후 1616년 60세의 나이로 여주목사로 나갔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臨湖書院·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죽은 뒤 270여 년이 지난 1892년(고종 29)에 통정대부 병조참의 지제교에서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에 증직되었다. 1900년(고종 37)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道學忠節을 연명으로 상소하여 증시를 청하였고, 의정부가 覆請하여 고종도 가하다고 함으로써 朝家崇奬之典이 갖추어져서 후손 甲秉이 시장을 서정순에게 위촉하여 본 시장이 찬술되었다.
고종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1901년 2월 15일에 中樞院議官 安鍾悳이 故 宣武原從功臣 김용의 시호 제정에 대한 상소를 올려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에서 稟處하도록 하겠다는 비답이 내려졌고, 1902년 2월 2일에는 議政府議政 尹容善의정부에서 품처한 내용을 아뢰는 가운데 吏曹判書 김용은 先正臣 李滉의 高弟로서 道學에 일가견이 있으니 諡號를 의논하는 모임이 열리기를 기다려 모두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어 윤허를 받아냈다.
특성 및 가치
조선 중기 인물인 김용의 행적을 알 수 있으며, 한말 증시 행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집필자
임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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