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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증병조판서신공초시장(贈兵曹判書辛公礎諡狀)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민종묵(閔種默) 찬(撰)
작성시기    :
1910 / 융희 4년
형태사항    :
크기: 43.6×33.9cm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5.8×30.3cm / 인장정보: 藏書閣印
청구기호    :
K2-826
M/F번호    :
MF35-1955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후에 군수를 지낸 辛礎(1568~1637)에게 시호를 청하는 시장이다.
서지사항
四周單邊, 半葉 12行, 無魚尾의 필사한 黑色 印札空冊紙를 사용한 총 세 장의 필사본이다. 크기가 큰 편이어서 七針眼으로 선장되어 있다. 表紙書名은 ‘贈兵曹判書辛公礎諡狀’이며, 종이 題籤에 필사하였다. 앞표지 곳곳에 蟲害가 있다. 권말에는 1910년(융희 4)閔種默이 썼다는 기록이 있어 필사 연대를 알 수 있다.
체제 및 내용
신초辛(石+甲) 형제의 시호를 청하는 시장으로, 먼저 신초의 선계를 간략히 정리하고, 군수공 신초의 행적과 현감공 신갑의 행적을 자세히 서술하였으며, 끝으로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고 있다. 시장은 신초의 후손인 辛泳學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여 閔種默(1835~1916)이 1910년 8월에 찬하였다.
신초의 본관은 靈山, 자는 友叟, 호는 聞巖이다. 1583년(선조 16) 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1년 天城萬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天城島가 孤島이므로 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한 후 합천군수 李潚, 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郭再祐軍과 합류하여 활약하였다. 孔撝謙이 적에게 항복한 후 영산에 웅거하며 경상도 관찰사를 자처하고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그의 진영에 잠입해 계략을 써서 그를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 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하여 영남에서 목민관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 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 전투에서 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뒤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1772년(영조 48)장령 愼爾復金海가 포위되어 궤멸될 때에 신초旺山에다 柵을 설치하고 말에 뛰어올라 渡江하여 계책을 세워 적을 포박했으니 嶺右가 그때에 보존된 것은 실로 신초의 공이므로 贈恤하는 은전을 마땅히 곽재우와 더불어 고르게 받았어야 하는데, 증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증직을 청하였으나 당시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1883년(고종 20)에 이르러서야 동생 신갑과 함께 두 형제가 병조판서에 특별히 증직되었다.
순종실록』과 관보에 의하면, 신초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은 1910년 8월 26일이며, 시호는 忠壯으로 諡註는 ‘慮國忘家曰忠 勝敵志强曰壯’이다. 신초는 관직상으로는 증시 대상이 아니지만, 『大典通編』 규정에 새로 수록된 “유학으로 현명이 있는 자 및 절의에 죽은 사람으로서 특히 드러난 자에게 증시를 허락한다.”는 규정에 입각하여 본 시장이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집필자
임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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