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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해동외사(海東外史)

기본정보

류    :
사부
작성주체    :
편자미상(編者未詳)
작성시기    :
사년미상(寫年未詳)
형태사항    :
크기: 30.2×21.0cm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인장정보: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310
M/F번호    :
MF35-337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상세정보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정의
1796년(정조 20)부터 1800년(정조 24) 사이에 찬술된 전적으로 倭亂과 胡亂을 전후한 시기에 功業을 세우거나 충절을 지켰음에도 正史에 누락되거나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조선인과 明나라 遺民 등을 소개한 책이다.
서지사항
表紙書名은 ‘海東外史’이며, 書根題는 없다. 표지는 卍字文이며, 五針眼으로 線裝되었다. 표지 제첨의 테두리는 목판으로 인쇄되었고, 서명은 필사되었다. 서명 아래에는 ‘全’이 표기되어 있다. 앞표지 이면에는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본문은 괘선이 없는 종이에 필사하였는데, 종이를 도할하고 덧붙여 수정한 것이 있다.
체제 및 내용
본서는 왜란과 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공업을 세우거나 의리를 지킨 조선인과 명나라 遺民을 소개한 전적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역에 대해서도 그 연혁을 상술하고 있다. 본서에 언급된 인물이나 지역을 순서대로 꼽으면 李源, 黃功, 田好謙, 康世爵, 文可尙, 安龍福, 許格, 胡克己, 慶河昌, 朴延, 安克諴, 白大鵬, 金禹錫, 麻舜裳, 洪純彦, 羅德憲, 西山大師, 鄭鳳壽, 李亨翼, 田滿車, 尹儋, 朴泰星, 崔老, 田橫島, 飛鴻湖, 九峯山, 滄海, 五國城, 椵島, 肅愼氏故城, 劉仁軌城, 五六島, 急水門, 陽巖, 齋宮洞, 金鼇山, 陽陵井, 鳥嶺이다.
명나라 유민이나 유민의 후손으로서 공을 세우거나 의리를 지킨 이들이 가장 많이 선발되어 있다. 李源寧遠伯 李成梁의 손자이자 提督 李如松의 손자로 1789년(정조 13)五衛都摠府副總管에 임명되었고, 1796년(정조 20)咸鏡北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리고 黃功田好謙, 康世爵, 文可尙, 慶河昌, 朴延, 安克諴 등은 명청 교체기에 조선으로 유입되거나 조선을 도운 명나라 유민으로 이들 대부분에게 벼슬이 내려졌고, 이들의 자손들도 다수 서용되었다. 麻舜裳은 정유재란 때 왜구를 격파한 명나라 장수 麻貴의 손자로 정묘호란 이후 海西豊川으로 이거하였으나 끝내 서용되지 못했다. 胡克己五峯 胡宏의 후손으로 登州의 바다에 배를 띄운 후 표류하여 鳳山郡에 이르렀고, 북방을 유랑하다 利城에서 살게 되었으나, 끝내 청나라에 수용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호극기가 지은 “내 집은 저기 악양루 너머, 斑竹 심어진 울타리 가에 湘水가 흐른다네. 아득히 고향 낚시터 버드나무 그리노라니, 언제나 한가로이 낚싯배 묶을까.[儂家近隔岳陽樓, 班竹籬邊湘水流. 遙憶故園磯畔柳, 幾年閒繫釣魚舟.]”라는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본서에 선발된 조선인은 대부분 한미한 출신이나 지위에도 불구하고 大明義理를 지키거나 宗系辨誣와 왜란·호란 등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운 인물들이다. 安龍福은 東萊水軍의 能櫓軍으로서 일본에 들어가 울릉도독도조선의 영토임을 일본 막부가 자인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그리고 白大鵬(?~1592)은 조선 중기의 위항시인으로 임진왜란 때 尙州에서 전사했는데, 1792년(정조 16) 12월에 忠臣義士壇에 배향되었다. 金禹錫永柔縣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慈母山으로 피난했다가 講和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성문에 “나는 大明 天子의 백성이라! 왜란 때의 황제의 은혜를 여전히 기억하지. 오늘날 세상이 어찌 이 지경인가! 차라리 동해에 뛰어들어 폭군을 부끄럽게 만들리.[我是大明天子民, 皇恩尙記黑蛇春. 人間今日知何世, 寧蹈東溟恥帝秦.]”라는 시를 적어 의리를 현양한 인물이다. 洪純彦南陽府 출신의 譯官으로 赴京하여 한 여인을 도운 것을 계기로 宗系辨誣에 공을 세웠고, 李亨翼은 鍼醫로서 병자호란 때 和親의 부당함을 극력 호소하였다. 羅德憲(1573~1640)은 鞍峴戰鬪에서 세운 공로로 振武原從功臣에 봉해진 인물인데, 1636년(인조 14) 春信使로 瀋陽에 갔다가 국호를 이라 고치고 皇帝라 칭한 太宗의 國書를 끝내 거부하였다. 鄭鳳壽(1572~1645)는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서 4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龍骨山城을 지키며 큰 공을 세웠다. 崔老成歡驛吏1728년(영조 4) 李麟佐의 난에 驛館을 지킨 인물이다. 許格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太白山에 은거하며 ‘大明天地無家客’이라 自號했으며, 海西首陽山 夷齊廟에서 매년 毅宗이 죽은 3월 19일이 되면 새벽에 北山에 올라 분향하고 통곡하였다.
이외에 田橫島, 飛鴻湖, 九峯山, 滄海, 五國城, 椵島, 肅愼氏故城, 劉仁軌城, 五六島, 急水門, 陽巖, 齋宮洞, 金鼇山, 陽陵井, 鳥嶺의 위치와 형세, 연혁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본 전적의 찬술자와 찬술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여타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李源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서 1796년(정조 20) 정조이원에게 咸鏡北道兵馬節度使를 제수함으로써 공적에 보답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백대붕을 소개하며 壬辰年尙州에서 전몰한 이들을 위해 1792년에 忠臣義士壇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는 기사와 찬술자가 당시 전몰했던 金鎰을 위해 墓誌銘을 제작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찬술자는 정조를 ‘今上’이라 표현하고 있는 바, 김일의 묘비명을 제작한 정조조의 文臣이 1796~1800년에 『海東外史』를 찬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성 및 가치
본서를 통해 명청 교체기를 전후한 시기에 공적과 의리를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正史에서 배제되거나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한 한미한 인물과 명나라 유민에 대한 인물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명나라 유신의 후손에 대한 조선 후기의 역사적 평가와 조정의 恩典을 가늠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燃藜室記述
靖北祠四賢實記』(K2-457)
增補文獻備考
집필자
박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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